*이 마당은 주로 올량합 삼위 중에서 복여위(福餘衞)에 대한 자료를 번역해 실었다.
* 1637년에 황명직방지도(皇明職方地圖)에 표시된 타안(올량합) 삼위(朶顔三衛)의 위치, 선부(宣府)와 원나라 때 대정부(大定府) 위치를 볼 수 있다. (하버드대학 도서관)
1. 봉천통지(奉天通志) 권 56
태녕위(泰寧衞) 복여위(福餘衞) 〈타안위(朶顏衞)를 덧붙였다〉
명(明) 실록(實錄) : 홍무(洪武, 명 태조 주원장의 연호) 22년(1389년) 5월 신묘(辛卯), 置태녕(泰寧), 타안(朶顏), 복여(福餘) 삼위(三衞)를 올량합(兀良哈) 땅에 설치하고서 항복한 호(胡) 겨레를 살게 하였다.
명사(明史) 타안 삼위전(朶顏三衞傳) 〈외국전(外國傳) 9〉 : 타안(朶顏), 복여(福餘), 태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 곧 주원장)가 설치한 삼위(三衞)이다. 그 땅은 올량합(兀良哈)의 땅이니 흑룡강(黑龍江) 남쪽과 어양새(漁陽塞) 북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는 선비(鮮卑), 당(唐) 때에는 토곡혼(吐谷渾), 송(宋) 때에는 거란(契丹)이 모두 그 땅에 살았다. 원(元) 때에는 대녕로(大寧路) 북쪽 땅이었는데 고황제(高皇帝, 명 주원장)가 중원땅을 통일하고서 동쪽 울타리(東蕃)인 요왕(遼王) 혜녕왕(惠寧王)의 타안 원수부(朶顏元帥府)가 서로 이끌고서 명나라에 붙기를 간청하니 마침내 옛 회주(古會州) 땅에다 대녕도사(大寧都司) 영주(營州) 여러 위(諸衞)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 주권(朱權)을 봉하여 영왕(寧王)으로 앉히고 그곳에서 살며 지키게 하였다. 이미 자주 달단(韃靼)에게 털리자 홍무(洪武) 22년 태녕(泰寧), 타안(朶顏), 복여(福餘) 삼위(三衞)에 지휘사사(指揮使司)를 두고 그 우두머리로 하여 각각 자체적으로 그 무리를 이끌고서 침입자가 있게 되면 지원하게 하였다.
대녕(大寧) 앞에서부터 희봉구(喜峰口)에 이르고 선부(宣府) 가까이까지를 “타안위(朶顏衞)”라 하였고 금주(錦州), 의주(義州)에서 광녕(廣寧)을 거쳐 요하(遼河)에 이르기까지를 “태녕위(泰寧衛)”라 하였으며 황니와(黃泥窪)에서부터 심양(藩陽),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를 “복여위(福餘衛)”라 하였다.
섭향고(葉向高, 명나라 때 인물)의 타안 삼위고(朶顏三衞考) 〈사이고(四夷考)〉 : 홍무(洪武) 21년 〈22년으로 적어야 맞다. (1389년)〉 옛 원(元)나라 종실이었던 요왕(遼王) 아리실례타(阿里失禮朶)와 타안(朶顏)의 여러 추장이 말씀을 올려 명나라에 붙고자(内附) 한다고 하니 명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삼위(三衞)를 세워서 살게 하였다. 금(錦), 의주(義州)에서부터 광녕(廣寧)을 거처 도하(洮河)에 이르기까지를 태녕위(泰寧衞)로 하고 황니와(黃泥窪)에서부터 심양(藩陽),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를 복여위(福餘衞)로 하였으며 전영(全寧)에서부터 희봉(喜峰)에 도달해 선부(宣府) 가까이까지를 타안위(朶顏衞)로 하였다.
방흥기요(方興紀要) 〈십팔(十八)〉 : 올량합(兀良哈)은 대녕위(大寧衞) 북쪽에 있으니 그 땅 동쪽은 바다를 누르고 있고 서쪽은 개평(開平)에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북해(北海)에 도달한다. 홍무(洪武) 22년, 옛 원(元) 종실(宗室)인 요왕(遼王) 아례실리(阿禮失里)와 타안(朶顏)이 명나라로 붙기(內附)를 청하여 명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올량합(兀良哈)의 땅에다 삼위(三衞)를 설치하고 이들을 살게하였다. 그 땅은 황수(潢水) 북쪽에 있으니 바로 요(遼)와 금(金)나라 때에 임황(臨潢), 경주(慶州) 여러 지역 안을 “태녕위(泰寧衞)”라 하고 동쪽을 “복여위(福餘衞)”라 하였으며 서쪽을 “타안위(朶顏衞)”라 하였다. 정통(正統, 명 영종 연호) 14년(1449년), 복여(福餘), 태녕(泰寧)이 야선(也先)과 결탁하여 변방 새(塞)을 침범하였는데 타안(朶顏)만은 험지를 막아서고서 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자기들에게 이롭지 못하게 되자 두 위(二衞)는 더욱 시들어졌고 타안(朶顏)만이 강성하여졌다. 이후에 삼위(三衞)는 저 중요한 위치임을 끼고서 요하(遼河) 동서에 삼차하(三岔河) 옛땅을 깡그리 몰수하였다. 초기에 위(衞)의 제도는 태령(泰寧)을 우두머리로 삼아 삼위(三衞)로 나뉜 땅은 사방으로 뻗은 길이가 모두 천여 리였는데 타안(朶顏)이 더욱 강성해짐에 미쳐서는 마침내 이들이 우두머리로 일컬어졌다. 광녕둔(廣寧屯)에서부터 희봉(喜峯)을 거쳐 선부(宣府)를 가에 둔 곳이 모두 타안(朶顏)에 속하였고 금(錦), 의주(義州)에서부터 황하(潢河)를 건너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곳이 모두 태녕(泰寧)에 속하였으며 황니와(黃泥窪) 동쪽에서부터 개원(開原)에 이르는 곳이 모두 복여(福餘)에 속하였으니 동서로 뻗은 것이 삼천리라, 계(薊)와 요(遼)가 날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졌다.
열하지(熱河志) : 삼위(三衞)의 분계선 오직 타안(朶顏), 태녕(泰寧) 두 위(二衞)만이 지금에 승덕부(承德府) 전체 영역에 속하였다. 왕세정(王世貞, 명나라 때 사람)의 삼위지(三衞志)에서 ‘삼위의 경계를 나눈 것은 태조(太祖) 22년(곧 홍무(洪武) 22년인 1389년)에 정해졌다.’라고 하고 정요(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서는 ‘영락(永樂) 원년(元年, 1403년)에 정해졌다.’ 하였다. 명사(明史) 낙안전(諾顏傳)에서는 세정(世貞)의 주장을 따랐지만, 그러나 태조(太祖) 22년에 바로 대녕(大寧)의 여러 위(諸衞)를 나누어서 설치하던 때를 맞아, 타안(朶顏) 삼위(三衞)가 어찌 그 땅에서 섞여 나올 수 있었겠는가? 영락(永樂) 원년(元年)에 정해졌다고 한 것 역시 적확한 근거를 둔 살핌이 있지 않다.
명실록(明實錄)에 영락(永樂) 원년(元年) 11월에 신창백(新昌伯) 당운(唐雲)에게 명하여 소흥주(小興州), 대흥주(大興州)에서 동쪽으로 우령(牛領), 회주(會州), 탑산(塔山), 용산(龍山)과 맞닿은 여러 곳에 군대를 이끌고서 주둔하여 땅을 개간하며 살되 북쪽으로 회주(會州)를 나가지 말고 서쪽으로는 천호채(千戶寨)를 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영락(永樂) 19년(1421년) 11월, 변장(邊將)에 명하여 고북구(古北口) 북쪽 신수(神樹)의 땅에다 나기영(邏騎營, 邏騎는 정찰을 맡을 기병이다)을 설치하게 하였다. 이곳은 그때, 개평(開平) 동쪽, 흥주(興州) 북쪽 2~3백 리가 오히려 명나라 본국(内地) 삼위(三衞)의 경계가 되었으니 어찌 서쪽으로 선부(宣府) 가까이까지 그 타안 삼위의 영역이 될 수 있었겠는가?
선덕(宣德, 명 대종(代宗) 연호) 3년(1482년), 변장(邊將)이 ‘올량합(兀良哈)이 대녕(大寧)을 들어와 회주(會州)를 거쳐 장차 관하(寬河)에 이르게 생겼다’라고 아뢰었다.
경태(景泰, 명 대종의 연호) 원년(元年, 1450년), 삼위(三衞)가 대녕 폐성(大寧廢城)에서 살게 해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고 영을 내려 변방 근방 2백 리 밖에서 머물며 가축을 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들어왔다(入)” 하고 “간청하였다(乞)” 하는 그때는 옛 대녕성(故大寧城)으로 오히려 변방 밖에 빈터(隙地)로써 삼위(三衞)의 경계였는데 어찌 남쪽으로 희봉(喜峰)에 닿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여러 책을 참고하여 톺아보겠다. 오학편(吾學編), 방흥기요(方興紀要)에 실린 것에 근거하자면, 홍무(洪武) 22년 올량합(兀良哈)을 나누어 황하(潢河) 북쪽에 삼위(三衞)를 만들었으니 복여(福餘)라 하고 타안(朶顏)이라 하며 태녕(泰寧)이라 하였다. 이 삼위(三衞)의 처음에는 그 땅이 모두 황하(潢河) 북쪽에 있었던 것이고 홍무(洪武, 명 태조의 시대)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내지로 옮긴 적이 없었다. 홍무(洪武, 1368년 ~ 1398년) 때에 대녕위(大寧衞) 북쪽에 오히려 전영위(全寧衞)가 있어서 전영위(全寧衞) 북쪽에서부터 비로소 타안(朶顏) 삼위(三衞)가 만들어졌다. 그 당시 변방 밖에 여러 위(諸衞)는 모두어져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에 예속되었고 대녕은 특히나 행도사(行都司)의 치소(治所, 소재지) 땅이었을 뿐이다. 영락(永樂) 원년(元年, 1403년) 3월, 처음으로 대녕위(大寧衞) 땅을 갈라서 삼위(三衞)에게 주니 대략 삼위(三衞)에 가까이 있는 땅을 가지고서 갈라서주었고, 그 옛 성(故城)은 오히려 아직 갈라서 특별히 위(衛)를 옮겨 살게 하지 않았다가, 뒤에 버려두어 빈 성(城)이 되었다. 그래서 경태(景泰, 명나라 7대 임금 대종(代宗)의 연호. 1450년 - 1457년) 때에 삼위(三衞)가 이 성(城)을 간청하였어도 미처 허락하지 못한 것이다. 태녕성(大寧城) 남쪽에까지 더욱 위(衛) 땅이 아니었고 그들이 정(庭)을 세운 곳은, 그대로 황수(潢水) 북쪽이었다. 영종 실록(英宗實錄)에서 정통(正統) 9년(1444년), 삼위(三衞)를 토벌할 때 대(大), 소흥주(小興州)를 거쳐 신수(神樹)를 지나 전영(全寧)과 호두산(虎頭山)에서 이들을 깨뜨렸음이 증거가 될만한 것이다.
경태(景泰) 이후, 명을 내려서 삼위가 변방 새(塞) 밖 2백 리로 가서 살게 하니 비로소 다시 옮겨 남쪽으로 갔다. 톺아보면 옛 대녕성(故大寧城)은 변방과 거리가 4, 5백 리이며 신성(新城)은 변방과의 거리가 3백 9십 리이니 그 당시에 이미 삼위(三衛)로 하여금 변경 가까이 2백 리에 살기를 명하였으니, 여전히 대녕 폐성(大寧廢城)에 살게 할 수 없었다. 이곳은 변방 밖 구탈(甌脫, 변경의 황무지) 땅에서도 오히려 멀어 명(明) 중엽 이후부터 나라 형세가 날로 쪼그라들자 장성(邊牆) 바깥에 사람들을 보기를 적국(敵國)마냥 보았고 대녕(大寧) 여러 위(諸衞)는 비로소 삼위(三衞)가 깡그리 소유하였다.
오학편(吾學編)에 실리기를 가정(嘉靖) 11년(1532년), 무순(巡撫, 총독과 같이 지방 최고 장관) 왕대용(王大用)이 타안(朶顏)과 소통하여 두터이 뇌물을 주고 그 무령산(霧靈山)에 성(城)을 쌓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실려있다. 무령산(霧靈山)은 마란관(馬蘭關) 밖 준화주(遵化州)의 테두리에 있다. 이는 그 성(城) 남쪽이 장성(長城)에 닿아 있다.
명사(明史)는 세정(世貞)의 주장을 근거하여 뒷날의 강역 판도를 가장 초기의 판도(版圖)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이 내용의 실제를 다 캐낸 적이 없어서 이를 자세히 따져 보았다.
〈살펴보면 명(明) 초기,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衞)은 멀리 황하(潢河) 이북에 살았고 정통(正統, 명 영종의 연호, 1436년 - 1449년) 끝 무렵에 비로소 남쪽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경태(景泰) 이후에는 다시 요 하투(遼河套)의 땅으로 들어가 틀어쥐었다. 기요(紀要)와 열하지(熱河志)에서 서술하여 밝힌 내용이 가장 분명하니 정론(定論)으로 삼을 수 있겠다.
필공(畢恭, 명대(明代) 전둔위(前屯衛, 지금 요녕성 수중현(綏中縣) 서남의 전위(前衛)에 적을 둔 사람. 요동도사(遼東都司) 관원 중에 정책에 탁월하였다 함)이 변경의 담(邊牆, 장성)을 쌓아 요하(遼河) 하류 대부분을 변방 밖으로 두자는 의론이 있고부터 대개 지금에 신민(新民), 흑산(黑山), 창무(彰武)와 그 비스듬히 북쪽으로 뻗은 곳으로 옛 과이심기(舊科爾沁旗)의 땅 중에 봉천성(奉天省)에 속한 것은 모두 점차 삼위(三衛)가 틀어쥐게 되었다. 요동(遼東)과 전료(全遼) 두 지(志)의 총도(總圖)를 톺아보면 그 얼개를 볼 수 있다. 광녕(廣寧)에서 비스듬한 서쪽은 삼위(三衞)와 경계를 나눈 곳이 대략 청대(淸代)의 유조변(柳條邊)과 그리 서로 멀지 않다. 타안(朶顏)은 서쪽에 있으니 그 전부가 모두 지금 열하(熱河)의 땅 안에 있다. 〈열하지(熱河志) : 지금 승덕부(承德府)의 본 영역에 난평현(灤平縣), 풍녕현(豊寧縣), 평천주(平泉州), 건창현(建昌縣)은 타안위(朶顏衛) 땅이 된다. 〉 태녕(泰寧)은 그중에 한 부(部)를 차지하여 열하(熱河) 영역에 있다. 〈열하지(熱河志) : 지금에 조양현(朝陽縣)이 태녕위(泰寧衛) 땅이다.〉 그리고 광녕현(廣寧縣) 이북과 도아하(洮兒河) 이남의 땅 역시 여기에 속한다. 이른바 금의(錦義)에서 광녕(廣寧)을 거쳐 요하(遼河)까지가 태녕위(泰寧衛)라 함이 이것이다. 복여(福餘)는 동쪽에 있으니 그 전부가 모두 봉천(奉天)의 영역 안에 있다. 이른바 황니와(黃泥窪)에서 심양(瀋陽),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에 이르는 곳이 바로 지금 요하(遼河) 양 기슭에 쭉 이어진 땅이다.
따라서 삼위(三衞)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오직 복여(福餘)와 태녕(泰寧) 두 위(衞)만이 봉천(奉天)과 맥이 닿아 있어서 타안(朶顏)의 경우는 마땅히 이 봉천통지에서 생략한다.
⇒ 요하투(遼河套) : 요하투(遼河套)는 개원(開原) 서북, 옛날 현주성(顯州城)에 아래에 있다. 물이 달고 땅이 도타우며 만경(萬頃, 백만 묘(百萬畝), 백묘(百畝)는 일경(一頃), 일경은 대략 6.7헥타르) 이상의 형지가 펼쳐져 있다. 명(明) 선덕(宣德) 이전에 모두 변방 내(邊內)에 속하였는데, 필공(畢恭)이 변장(邊牆)을 세운 뒤로부터 마침내 영토의 영역 바깥(境外)으로 놓이게 되어, 가융(嘉隆) 사이에 점차 복여위(福餘衞)의 두목 손아귀에 들어갔다. 〈가융(嘉隆)은 명 11대 임금 세종(世宗)의 연호인 가정(嘉靖, 1522년 –1566년)과 12대 임금 목종(穆宗)의 연호인 융경(隆慶, 1567년 – 1572년), 13대 임금인 신종(神宗)의 연호인 만력(萬曆, 1573년 –1620년)을 아우르는 연호이다.〉 천명(天命, 청 태조의 연호) 4년(1619년 ), 태조(太祖)가 이미 개새(介賽) 【재새(宰賽)라고도 쓴다. (명나라 말, 몽고 내객이객(内喀爾喀) 오부(五部)의 영주)】 패륵(貝勒)을 사로잡자 객이객(喀爾喀)【곧 복여위 도독(福餘衞都督)의 뒤이다.】의 온 부(部)가 북쪽으로 옮겨갔고 이 땅은 마침내 구탈(甌脫, 변경의 황무지)이 되었다. 애석하구나, 변경 안(邊內)으로 두어서 그들로서 주둔하며 농사짓게 하지 못함이여!
요동(遼東)의 금주(金州), 여순구(旅順口)는 산동(山東)의 등(登), 협주(萊州)와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바람이 순조로울 때 돛을 올려 출발하면, 하룻밤이면 닿을 수 있다. 명(明)나라 때, 식량을 운반하거나 재화를 운반할 때면 자주 이 길을 밟았으니, 예컨대 영락(永樂, 1403년 – 1424년)과 선덕(宣德, 1426년 – 1435년) 사이에는 바다로 운송할 경우, 여순구(旅順口)에서 질러 개원성(開原城) 서쪽 노미만(老米灣)에 도달하였으니 그 옛 자취가 여전히 남아있어 고증할 수가 있다. (유변기략(柳邊紀略 ))
柳邊紀略 遼河套在開原西北舊顯州城下水甘土厚平地不下萬頃明宣德以前皆屬邊內自畢恭立邊牆後遂置境外嘉隆間漸為福餘衞頭目所據天命四年太祖既擒介賽【一作宰賽】貝勒喀爾喀【即福餘衞都督後】舉部北徙此地遂成甌脫惜乎不置邊內以之屯種也 遼東金州旅順口距山東登萊甚近順風揚帆一日夜可達明時運糧運貨往往由此若永樂宣德間海運則自旅順口徑達開原城西老米灣舊跡猶存可得而考也
*유조변도(柳條邊圖). 유자변(條子邊), 성경변장(盛京邊牆)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숭덕(崇德) 3년(1638년)에 둑을 쌓아 버드나무 가지를 세우기 시작하여 강희(康熙) 20년(1681년)에 기본 틀을 완성하였다. 흙으로 쌓은 폭과 높이가 각각 3척(尺)의 흙둑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었다. (바이두)
*1883년 중국 동북부 지도이다. 세 부분의 유조변(柳條邊)을 확인할 수 있다. (유기백과)
2. 바이두에서 소개한 복여위(福餘衛)
복여위(福餘衛)는 북원(北元) 초기에 명(明)나라 조정이 동북 몽고(蒙古)지구에 설치한 위(衛)로써 올량합(兀良哈) 삼위(三衛)의 하나이다. 소속된 백성들은 몽고(蒙古) 오제엽특부(烏齊葉特部) 사람들이라서 명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아착(我著)”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成吉思汗)에 가까운 친척인 홀독랄칸(忽禿剌汗)의 후예이다. 북원(北元) 초기에 지금 제제합이(齊齊哈爾) 지구에서 지내며 가축을 쳤다. 1389년 명(明) 조정이 이 땅의 오제엽특부(烏齊葉特部) 사람을 정벌한 뒤에 위(衛)를 설치하였고 원(元)나라에서 신하 노릇을 했던 해살남답해(海撒男答奚)를 임명하여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삼고 인솔하고 있던 부(部)의 사람과 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1399년에서 1402년 사이에 주원장의 아들 주체(朱棣)가 영왕(寧王) 주권(朱權)을 꺾어 물리치고 제위(帝位)에 오르는 데에 일조하였다. 뒤에 아로태 태사(阿魯台太師)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15세기 중엽에 남쪽으로 내려와 심양(沈陽), 철령(鐵嶺), 개원(開原) 일대에서 지내며 유목하며 가축을 쳤다. 몽고 좌익(蒙古左翼)이 동진(東進)한 뒤에 찰합이 만호(察哈爾萬戶)와 내객이객부(內喀爾喀部)로 귀순하였다.
福餘衛 : 福餘衛,北元初期明廷在東北蒙古地區所設的衛,爲兀良哈三衛之一。屬民爲蒙古烏齊葉特部人,故明人稱其爲“我著”。爲成吉思汗近親忽禿剌汗的後裔。北元初期駐牧於今齊齊哈爾地區。1389年明廷征服此地的烏齊葉特部人後設衛,任命元臣海撒男答奚爲指揮同知,領所部人馬。1399-1402年間幫助朱棣挫敗寧王朱權即帝位。後與阿魯台太師一起攻擊明朝。15世紀中葉南下,駐牧於沈陽、鐵嶺、開原一帶。蒙古左翼東進後歸察哈爾萬戶和內喀爾喀部。
3. 위키백과 중문판에서 소개한 복여위(福餘衛)
복여위(福餘衛)는 명(明)나라 때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하나이다. 땅이 옛 부여국(古夫餘國)에 있었던 곳이기에 그 이름을 얻었고 또한 “올자(兀者)”라고도 불린다.(만어(滿語)에 “와집(窩集)”과 원류가 같으니 “숲속의 사람”의 별칭이다.)
홍무(洪武) 22년(1389년), 기미위(羈縻衛,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였다. 관할 구역은 처음에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눈강(嫩江) 하류 일대였고 그 수령은 칭기스칸의 아우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이었다. 동몽고(東蒙古)와 와랄(瓦剌, 서몽고에 해당)의 여러 부족의 압박을 피하여, 선덕(宣德, 1426년—1435년)과 정통(正統, 1436년—1449년) 뒤에는 남쪽으로 옮겨 지금에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심양(沈陽), 철령(鐵嶺), 개원(開原) 등 시현(市縣) 일대에 이르렀다. 1424년 과이심부(科爾沁部)는 와랄(瓦剌)의 탈환(脫歡)에게 공격을 당해 패배하여 복여위(福餘衛)에 몸을 의탁하였다. 복여위(福餘衛)의 수령 자리는 알적근계(斡赤斤系)를 말미암아 나왔다가 합살이계(哈薩爾系)로 바뀌었다. 뒤에 몽고 여러 부(諸部)가 명나라 조정 아래의 요동(遼東) 일대를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키는 데에 참여하였다. 16세기 중엽 후에 과이심부(科爾沁部)에 병탄되었다.
福余衛 : 福余衛,明朝兀良哈三衛之一。因地在古夫余國得名,也被稱為「兀者」(與滿語「窩集」同源,林中人的代稱)。
洪武二十二年(1389年)置羈縻衛。轄境初在今黑龍江省嫩江下遊一帶,其首領是成吉思汗弟弟鐵木哥斡赤斤的後裔。因躲避東蒙古和瓦剌諸部壓迫,宣德、正統後南遷至今遼寧省遼陽、沈陽、鐵嶺、開原等市縣一帶。1424年,科爾沁部爲瓦剌脫歡擊敗,投奔福餘衛。福餘衛首領由斡赤斤系轉入哈薩爾系。後參與蒙古諸部對明朝遼東一帶的侵擾。16世紀中葉後爲科爾沁部所吞並。
*봉천통지 원문
奉天通志卷五十六 泰寧衛 福餘衛 〈朶顏衞附〉
明實錄洪武二十二年五月辛卯置泰寧朶顏福餘三衛於兀 良哈之地以居降胡
明史朵顏三衛傳〈外國傳九〉朶顔幅餘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其 地爲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 皆其地也元爲大寧路北境高皇帝有天下東蕃遼王惠寧王 朶顏元帥府相率乞內附遂即古會州地置大寧都司營州諸 衛封子權爲寧王使鎮焉已數爲韃靼所抄洪武二十二年置 泰寧朵顏福餘三衛指揮使司俾其頭日各自領其眾以為聲 援自大寧前抵喜峰口近宣府日桑顏衛自錦義歷廣寧至遼 河日泰寧自黃泥崔逸瀋陽鐵嶺至開原日福餘 葉向高朵顏三衛考洪武二十一年故元宗室遼 王阿里失禮朶及朵顏諸酋奏願內附詔立三衛以居自錦義 開原為福 歷廣寧至洮河爲泰寧衛自黃泥窪踰瀋陽鐵嶺至 餘衛自全寧抵喜峰近宣府爲朶顏衛 方輿紀要兀良哈在大寧衛北其地東按海西連開平北抵 北海洪武二十一年〈應作二十二年〉故元宗室遼王阿禮失里及朶顏請內附 詔以兀良哈之地置三衛居之其地在滿水之北卽遼金時臨
黃慶州諸境中日泰寧衛東日福餘衞西日朶顏衛正統十四 年福餘泰寧結也先犯塞朵顏獨扼險不從因不得利二衛益 衰而朵顏獨強嗣後三衛挾彼爲重盡沒遼河東西三岔河故 地初衛制以泰寧爲首三衛所分地延袤共千餘里及朶顏益 強遂爲首稱自廣寧屯歷喜峯邊宣府者皆屬朶顏白錦義度 横河至白雲山皆屬泰寧自黃泥窪以東至開原皆屬編餘東 西亙三千里薊遼日以多事
熱河志〈六十三〉案三衛分界惟朵顏泰寧二衛屬今承德府全境 地王世貞三衛志以爲分界定於太祖二十二年鄭曉吾 以爲定於永樂元年明史諾顏傳從世貞說然當太祖二十二 學編 年正分置大寧諸衛之時朵顏三衛安得雜出其地卽以 爲定 於永樂元年者亦未有的據攷明實錄永樂元年十一月命新 昌伯唐雲領軍自小興州大興州東接牛領會州塔山龍山諸 處屯種北勿出會州西勿過千戶築又永樂十九年十一月命 邊將置邏騎營於古北口北神樹之地是其時開平以東興州 以北二三百里猶為內地三衛之界安得西近宣府宣德三年 邊將奏兀良哈入大寧經會州將及寬河景泰元年三銜乞居 大寧廢城不許令近邊二百里外住收日入日乞是其時故大 寧城猶邊外隙地三衛之界安得南抵喜峰今以諸書參攷之 據吾學編方輿紀要載洪武二十二年分兀良哈爲三銜於潢 河之北日福餘日朶顏日泰寧是三衛之始其地皆在满河北 也終洪武之世未嘗內徙洪武時大寧衛北尙有全寧衛自全
寧衛北始爲朶顏三衛其時邊外諸衛總隸北平行都司大寧 特行都司所治之地耳永樂元年三月始割大寧衛地以界三 衛大約印其近三衛之地割以與之其故城尙未割特徙衛之 後棄為空城故景泰時三衛乞此城而未許也至大寧城南更 非其地其建庭處仍在黃水北英宗實錄稱正統九年討三銜 經大小興州過神樹破之於全寧及虎頭山可證也景泰後令 去塞外二百里居住始更徙而南攷故大寧城距邊四百五十 里新城距邊三百九十里其時已令近邊二百里猶不能居大 寧廢城是邊外廠脫地尙遠自明中葉以後形勢日蹙邊牆以 外視如敵國大寧諸衛始盡為三衛所有吾學編載嘉靖十一 年巡撫王大用欲通朶顏與厚賂城其霧靈山不果霧靈山在 馬蘭關外遵化州界上是其城南抵長城矣明史據世貞 以後來之疆域為最初之版圖未爲核實故詳辨之 之說 按明初兀良哈三衛遠居黃河以北至正統末始南侵景泰 以後更入據遼河套之地紀要及熱河志敘辨最明可爲定 論自畢恭議築邊牆置遼河下游之大部於邊外凡今新民 黑山彰武及其運北舊科爾沁旗之地屬於奉天省者皆漸 爲三衛所據觀遼東全遼兩志之總圖即可見其梗概自廣 寧迤西與三衛分界處大略與清代之柳條邊不甚相遠朶 顏在西其全部皆在今熱河境內 〈〉泰寧居中其一部在熱河境〈〉 而在廣 寧以北洮兒河以南之地亦屬之所謂自錦義歷廣寧至遼
河爲泰寧衛是也福餘在東其全部皆在奉天境內所謂自 黃泥窪逾瀋陽鐵嶺至開原者卽爲今沿遼河兩岸之地故 考三衛之事蹟惟兩餘泰寧二衛涉及奉天朶顏則應從略
'숙신(肅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5 (2) | 2024.10.31 |
---|---|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4 (2) | 2024.10.24 |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2 (2) | 2024.10.10 |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1 (1) | 2024.10.03 |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0 (1) | 2024.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