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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1

by 쥐눈이 2024. 10. 3.

*아래는 명나라 올량합 삼위 (兀良哈 三衛) 에 대한 자료이다.

흠정고금고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方輿彙編) 변예전(邊裔典) 124권 상

산융부 휘고(山戎部彙考) 1 () 고막해(厙莫奚) 올량합(兀良哈)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령(泰寧) 삼위(三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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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 주원장)가 설치한 삼위(三衛)이다. 그 땅은 올량합(兀良哈)이 되니 흑룡강(黑龍江) 남쪽 어양(漁陽) 변방() 북쪽에 있다. ()나라 때는 선비(鮮卑), () 때에는 토곡혼(吐谷渾), () 때에는 거란(契丹)이 모두 그 종류들이다. ()나라 때는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었다. 고황제가 중원 땅을 통일하니 동쪽 울타리인 요왕(遼王), 혜녕왕(惠寧王), 타안 원수부((朵顏元帥府)가 서로를 이끌고서 안으로 붙기를 간청하여 이에 옛 회주(古會州) 땅에 대녕도사(大寧都司), 영주제위(營州諸衛)를 설치하고, 주원장 아들 권()을 영왕(寧王)을 삼고서 그 지역을 진정시키게 하였다. 이미 몇 번이나 달단(韃靼)에게 약탈을 당하였다.하였다.

 

명회전(明會典)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타안위(朵顏衛), 복여위(福餘衛), 태녕위(泰寧衛), 올량합(兀良哈)은 곧 옛 산융(古山戎)이니 훗날에 고막해(厙莫奚)라고 일컬어지는데 오룡강(烏龍江) 남쪽과 어양새(漁陽塞) 북쪽에 있다. ()나라 때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다. 명나라 초기에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를 마련하였다. 홍무(洪武) 14(1381), 대녕(大寧) 땅에 아들 권()을 봉하여 영왕(寧王)으로 삼았다. 21년 요왕(遼王), 혜녕왕(惠寧王), 타안 원수부(朵顏元帥府) 원수(元帥) 등이 각각 사신을 보내와 알현하였다.

 

홍무(洪武) 22, 처음으로 태녕(泰寧), 타안(朵顏), 복여(福餘) 3(三衛)를 설치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홍무(洪武) 22년에 마침내 태녕(泰寧), 타안(朵顏), 복여(福餘) 삼위 지휘사사(三衛指揮使司)를 설치하고 그 두목(頭目)으로 하여 각자 독자적으로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지원하게 하였다. 대녕(大寧) 앞에서 희봉구(喜峰口)에 이르러 선부(宣府)에 가까운 구역을 타안(朵顏)”이라 하고 금(), 의주(義州)에서 광녕(廣寧)을 거쳐 요하(遼河)에 이른 구역을 태녕(泰寧)”이라 하며 황니와(黃泥窪)에서 심양(瀋陽)의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에 이른 구역을 복여(福餘)”라 하였다. 이 중에 타안(朵顏)만은 땅이 험하고 강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모두 반기를 들어 등을 돌렸다.하였다.

 

명회전(明會典)을 살펴보면

22년 드디어 올량합(兀良哈)을 나누어 횡수(橫水) 북쪽에다 삼위(三衛)를 만들었으니 타안(朵顏)”이라 하고, “복여(福餘)”하고, “태녕(泰寧)”이라 하여서 항복한 호()를 관리하며 지휘사(指揮使) 등에 관직을 제수하고서 각각 관과 띠(冠帶)를 하사하여 각자 관할하고 있는 부()를 거느리게 하였다.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泰寧) 삼위(三衛)의 차사(差使)를 보내는 일에서, 모두 스스로 도독(都督 : 중앙에 둔 전국 군정(軍政) 총괄 기구)에 차사를 보내오면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 안감과 겉감을 아우른 말) , 비단() 두 필()을 상으로 내리고, 도지휘(都指揮 : 지방 최고의 군사기구)에 차사를 보내오면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셋과 비단() 두 필()을 선물로 내렸다. 지휘(指揮), 천백호(千百戶)로서 군대를 주둔하고 지키면서 지역을 안정시키는 두목들에게는 각 사람에게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둘과 비단() 한 필, 그리고 각각 금실을 두어 짠 옷 한 장, 금실과 모시 실(金紵絲)로 짠 옷 한 벌(一套)을 주고, 또 각각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하나를 더해 주었다. 사인(舍人)에게는 각 사람에게 고급비단(綵段) 옷감(表里) 둘과 비단() 한 필, 금실로 짠 옷 한 벌(一套), 달자(達子, 수행원(從人))에게는 사람마다 고급 비단(綵段) 안감 겉감의 옷감(表里) 하나, 비단 한 필, 흰 모시 실로 짠 옷 한 벌()을 상으로 주었다. 부녀(婦女)가 공물을 올릴 경우, 각 사람에게 안감 겉감의 옷감(表里) 하나와 비단() 한 필, 모시 실로 짠 여자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렸다. 부녀를 따라온 사람에게는 안감 겉감의 옷감 하나, 비단() 한 필, 여자 옷 한 벌 이상, 가죽신()과 버선() 각 한 켤레씩을 선물로 내렸다. 황제에게 사정을 자세히 아뢰며 공물을 올릴 때, 도지휘(都指揮)에게는 비단 한 필, 고급 비단(綵段)으로 안감 겉감의 옷감 셋, 금실로 짠 옷 한 벌()을 선물로 내리고 지휘(指揮) 각 사람에게 비단 한 필, 견직물과 삼베(綿布) 한 필, 고급 비단(綵段) 겉감 안감의 옷감 둘, 모시 실로 짠 옷 한 벌(), 가죽신과 버선(靴襪) 각 한 켤레를 상으로 내렸다. 사인(舍人)이 어떤 일 때문에 공물을 올리는 경우, 각 사람에게 고급 비단(綵段) 안감 겉감의 옷감(表里) 하나, 금실로 짠 옷 한 벌(), 비단 한 필(), 가죽신과 버선 각 한 켤레씩을 상으로 내렸다.하였다. 천백호(千百戶) : 평소에는 농민 조직이요, 전시에는 군대 조직이 된다. 일반적으로 1천 호에 천호(千戶) 1, 1백 호마다 백호(百戶) 1명을 두었고 5십 호마다 백총(百總)을 두었다 한다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살펴보면

올량합(兀良哈)은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으로 개평(開平)의 경계에 연결되었으며 북쪽으로 북해(北海)에 이른다. 이곳은 본디 춘추(春秋) 시대에 산융(山戎)의 땅이었고 진() 때에는 요서군(遼西郡)의 북쪽 지경이었으며 한() 때에는 해 겨레의 추장(奚酋)이 틀어쥐었던 곳이다. 동한(東漢) 때 이곳을 정벌하여 깨뜨리니 해 겨레의 추장이 송막(松漠) 지역 사이로 달아나 숨었다. 후위(後魏)의 선조가 이곳을 다시 차지하였으니 고막해(厙莫奚)라 불렀다. 훗날 거란(契丹)에 복종하여 예속되었고 원() 때에는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었다. 우리 명나라 홍무(洪武) 22(1389), 북호(北胡)를 정벌하여 깨뜨렸을 때 항복해온 무리를 명() 태조가 조서를 내려서 올량합(兀良哈)의 땅에 태녕(泰寧), 타안(朵顏), 복여(福餘) 삼위(三衛)를 설치하고서 이들을 살게() 하여 동북의 바깥 울타리(外藩)로 삼았고 그 우두머리에게 명하여 지휘사(指揮使), 지휘동지(指揮同知)를 맡아서 각각 그 인솔하고 있는 부()를 거느리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朝貢)하였다.

 

인종(仁宗) 홍희(洪熙) 원년(元年, 1425), 삼위(三衛)에 조서를 내려 이왕의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는 것(自新)’을 허락하였다. 복여위(福餘衛)가 인장()을 도적에게 빼앗겨 인장을 청하는 주청을 올리니 이를 허락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인종(仁宗)이 지위를 잇고 삼위(三衛)에 조서를 내려 이왕의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을 허락하였다. 홍희(洪熙) 원년(元年), 안출(安出)이 그 인장을 도적에게 빼앗기고 다시 발급해주기를 청하였다. 인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겨울에 삼위(三衛) 두목(頭目) 아자독(阿者禿)이 와서 귀순하니 천호(千戶)를 주고 초폐(鈔幣, 곧 종이돈), 습의(襲衣 : 예를 행할 때 웃옷 위에 입는 옷), 안장 딸린 말(鞍馬)을 하사하고 그대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술과 음식(供具)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귀순해오는 사람들은 다 이대로 대우하였다. 하였다.

 

선종(宣宗) 선덕(宣德) 원년(元年) (1426), 삼위(三衛)가 영평(永平)과 산해(山海)를 노략하자 제()가 장수가 되어 몸소 이들을 토벌하였다. 삼위(三衛)가 사죄하니 이들을 다독이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선종(宣宗) 초에, 삼위(三衛)가 영평(永平)과 산해(山海) 사이를 노략질하였다. ()가 장수가 되어 몸소 이들을 토벌하니 삼위(三衛)의 두목들이 모두 사죄하고 공물을 들였다. 조정(朝廷)에서 다독이며 이들을 받아들인 것이 처음처럼 하였다. 라 하였다.

 

명회전(明會典)을 살펴보면

올량합(兀良哈)이 선덕(宣德, 14261435) 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하였는데 그 사신들이 오는 길에서 차와 먹거리를 대접하게 하였다. 선덕(宣德) 7, 삼위(三衛) 두목이 우리 조정을 공순 섬긴 지 오래되었기에 금폐(金幣)를 차등 있게 더해 주었다.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 복여 태녕전(朵顏福餘泰寧傳)을 살펴보면, 선덕(宣德) 7, 태녕위인(泰寧衛印)을 다시 지급하였다. 그 가을, 타안(朵顏) 두목 합라합손(哈剌哈孫)과 복여(福餘) 두목 안출(安出), 그리고 태녕(泰寧) 두목 탈화적(脫火赤) 들이 조정(朝廷)을 공순히 섬긴 지 오래되었다 하여서 금실과 짠 비단 안감과 겉감을 차등이 있게 더해 주었다.하였다.

 

영종(英宗) 정통(正統, 14361449) 때 삼위(三衛)가 들어와 도적질하였고 서몽고(西蒙古) 와랄의 야선(瓦剌也先)에 몰래 붙었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사이에 여러 차례 요동(遼東), 대동(大同), 연안(延安)의 경내로 들어와 도적질하였는데 독석(獨石, 지금 하북성 고원현(沽源縣) 독석구(獨石口))를 수비하고 있던 양홍(楊洪)이 이들을 쳐 깨뜨리고 그 두목 타란첩목아(朵欒帖木兒)를 사로잡았다. 얼마 있다 다시 와랄(瓦剌)의 야선(也先)에 붙었다. 태녕(泰寧)의 졸적(拙赤), 야선(也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니 모두 남몰래 그 눈과 귀가 되었다. 공물을 들일 때면 번번이 이름을 바꾸었고 서로 그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광녕(廣寧) 전둔(前屯)에도 침입하였다. ()가 그들의 왔다리갔다리하는 모습을 미워하였다. 하였다.

 

정통(正統) 9, 성국공(成國公) 주용(朱勇)들에게 명을 내려 삼위(三衛)를 정벌하게 하니 이들을 깨뜨렸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9년 봄, 성국공(成國公) 주용(朱勇)에게 명하여 공순후(恭順侯) 오극충(吳克忠)을 데리고 희봉(喜峰)으로 나가고 흥안백(興安伯) 서향(徐亨)은 계령(界嶺)으로 나가고 도독(都督) 마량(馬亮)은 유가구(劉家口)로 나가고 도독(都督) 진회(陳懷)는 고북(古北)으로 나가서 각자 정예병 만 명을 이끌고 나누어 삼위를 소탕하게 하였다. () 등이 변방을 소란하게 한 자들을 체포하여 궐 앞에 보내고 아울러 약탈을 당한 사람과 가축들을 도로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적(拙赤) 등이 비하위(肥河衛)를 취하고는 사인(使人, 노복)을 살해하였다. 비하위(肥河衛) 두목인 별리격(別里格)이 격로곤질련(格魯坤迭連)에서 졸적과 전투를 벌였는데 졸적(拙赤)이 크게 패하였다. 와랄(瓦剌)이 다시 길을 나누어 막고서 공격하여 죽이는데 별리격이 군사들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니 삼위(三衛)가 크게 곤란에 빠졌다.하였다.

 

*위 지도는 금고여지도(今古輿地圖) 3권에 나오는 지도이다.  명(明) 숭정(崇禎) [ 1628 - 1644] 때 제작한 것이라 한다. 지도 위쪽, 장성 표시된 위로 올량합과 대녕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서 내려받았다.

 

*지도총요(地圖總要)에 나오는 올량합 삼위 지도이다. 명나라 때, 대략 1643년에 제작되었다 한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서 내려받았다.

 

 

정통(正統) 12년 총병(總兵) 조의(曹義)등이 삼위(三衛)를 쳐서 깨뜨렸고 와랄(瓦剌)이 다시 크게 노략질을 하니 삼위가 야선(也先)에 항복을 간청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12년 봄, 총병(總兵) 조의(曹義), 참장(參將) 호원(胡源), 도독(都督) 초례(焦禮) 등이 나누어서 동쪽 변방을 순시하다가 삼위(三衛)가 들어와 도적질하는 것을 마주치고서 이들을 약탈하고 공격하여 함께 32명의 목을 베었고 70여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 해에 와랄 새간왕(瓦剌賽刊王, 야선(也先)의 아우)이 다시 타안(朵顏)의 내아불화(乃兒不花)를 공격하여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서 떠났다. 야선(也先)이 이어 이르렀으니 타안(朵顏), 태녕(泰寧) 모두 지탱하지 못하고 항복을 간청하였고 복여(福餘) 올로 달아나 뇌온강(腦溫江)으로 피하였다. 이에 삼위(三衛)는 더욱 쇠퇴하였고 강성한 와랄(瓦剌)이 두려워 감히 등을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해마다 명나라 조정에 와서 공물을 바쳤으니 그저 중국에서 하사한 선물을 이롭게만 여겼을 뿐이었다. 또 마음에는 변장(邊將)을 소탕하여 살해한 일을 품고 있었기에 늘 몰래 보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였다.

 

정통(正統) 14년 석향(石亨) 등이 삼위(三衛)를 쳐 깨뜨리니 삼위(三衛)가 와랄(瓦剌)을 대거 인도하여 들어와 도적질하였는데 상()이 이 때문에 북쪽으로 진군(北狩)하는 일을 벌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14년 여름, 대동참장(大同參將) 석형(石亨) 등이 그 변방을 후리는 자들을 전계산(箭谿山)에서 다시 공격하여 사로잡거나 참수한 사람이 50명이니 삼위(三衛)가 더욱 원망하였다. 그해 가을, 와랄(瓦剌)을 대거 인도하여 들어오니 영종(英宗)이 마침내 이 때문에 북쪽으로 군대를 진군시키는 일을 벌였다. 하였다.

 

대종(代宗) 경태(景泰, 1450~ 14571) , 사신을 보내 삼위(三衛)를 다독이고 타일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경태(景泰) , 조정(朝廷)이 사신을 보내 삼위(三衛)를 다독이고 타일렀다. 삼위(三衛)가 야선(也先)의 뜻()을 받아들여서 자주 때아닌 때에 명나라 조정에 공물을 들이고서, 대부분 사신을 보낼 때 오가는 길에 나라 안을 사찰하게 하였다. 이윽고 야선(也先)이 삼위를 잔혹하게 부려먹고 다시 타안(朵顏)이 인솔한 부()를 황하(黃河) 모납지(母納地)로 호되게 독촉하여 옮기게 하니 삼위(三衛) 모두가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몰래 와랄(瓦剌)의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고 변경 가까이에서 주둔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옛 제도에 삼위(三衛)는 해마다 세 번에 걸쳐 공물을 들이는데 그 공물을 올리는 사신(貢使)들은 모두 희봉구(喜峰口)에서 면밀한 검사를 거쳐 들어오고, 급한 보고가 있을 때면 영평(永平)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때에 삼위(三衛)의 사신이 독석(獨石)과 만전 우위(萬全右衛, 만전은 장가구(將家口))에서부터 온 사람이 있었는데 변신(邊臣)이 그 사신의 행동에 대해 이 길은 칙령으로써 금지하였다.”라고 알렸다.

 

*1582년 순천부(順天府)를 묘사한 지도이다. 희봉구, 독석(獨石)과 만전 우위(萬全右衛), 영주(榮州) 제위(諸衛), 타안과 달단(韃靼) 등의 위치를 볼 수 있다. 바이두에서 내려받았다.

 

 

헌종(憲宗) 성화(成化) 원년(元年, 1465), 삼위(三衛)의 타라간(朵羅干)이 들어와 도적질을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순천(天順, 영종(英宗)의 연호, 14571~ 1464) 중에 한번은 틈을 타서 여러 변방 지역을 노략질하고 다시 슬그머니 달단(韃靼)의 패래(孛來)와 내통하고 매번 그를 위해 길잡이를 하였다. 삼위가 보낸 사신과 패래(孛來)의 사신이 함께 영종(英宗)을 알현하고서 명나라가 달단(韃靼)에 대한 대접이 두터우니 그보다 더한 상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이에 크게 분노하더니 드디어 패래(孛來)와 더욱 끈끈하게 관계를 맺었다. 성화(成化) 원년(元年), 그 두목 타라간(朵羅干) 들이 군대로써 패래(孛來)를 따라 대거 요하(遼河)로 들어왔다. 얼마 있다가 다시 서쪽으로 모리해(毛里孩)에게 붙었고 동쪽으로 해서(海西)의 군대와 연합하여 자주 변방()을 침입하였다. 또 때때로 독자적으로 광령(廣寧), 의주(義州) 사이에 출몰하였다.하였다. 패래(孛來)15세기 몽고본부(韃靼國) 부족장, 객라심부(喀喇沁部) 사람. 위랍특 몽고(衛拉特蒙古)의 야선(也先)이 죽은 뒤에 몽고 동부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이끌었고 나란히 야선(也先)을 본떠 스스로 태사회왕(太師淮王)이라 하였다)

 

성화(成化) 9(1473), 삼위(三衛)가 요동(遼東)에 들어와 도적질하니 총병(總兵) 구신(歐信)이 이들을 쳐 무찔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9, 요동 총병(遼東總兵) 구신(歐信)이 편장(偏將) 한빈(韓斌) 들로서 중흥(興中)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추격하여 맥주(麥舟)까지 이르렀으니 머리를 벤 사람이 62명이었고 획득한 말과 가축, 기계가 거의 수천이었다. 그해에 희봉(喜峰)의 수장(守將) 오광(吳廣)이 뇌물에 환장하여서 삼위(三衛)의 마음을 잃어 삼위(三衛)가 들어와 범하여 광()을 옥에 보내 죽이었다. 하였다.

 

성화(成化) 10, 삼위(三衛)가 들어와 개원(開原), 경운(慶雲)에서 도적질하니 참장(參將) 주준(周俊)이 이들을 물리쳤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10, 다시 개원(開原), 경운(慶雲) 땅을 약탈하고 참장(參將) 주준(周俊)이 이들을 쳐 물러가게 하였다. 하였다.

 

성화(成化) 14, 조서를 내려 삼위마시(三衛馬市)를 다시 마련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14, 조서를 내려 삼위 마시(三衛馬市)를 다시 마련하게 하였다. 초에 국가에서 요동 마시(遼東馬市) 세 곳을 마련하였으니, 하나는 성동(城東)에다, 또 하나는 광령(廣寧)에다 차렸는데 두 말 시장 모두 삼위(三衛) 사람들을 허락하였다. 정통(正統, 1436~1449) 사이에 그 부()의 무리가 여러 차례 반기를 들어서 이곳(마시)을 파하였다. 때마침 달단(韃靼)의 만도로(滿都魯)가 포악하고 강성하여서 삼위(三衛)를 침입하여 약탈하여 삼위(三衛)의 두목이 모두 변방() 밑으로 피하여 달아나다 보니 여러 차례 굶주림과 어려움이 있어 다시 말 시장을 열게 해주기를 두 번 세 번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순무(巡撫) 진월(陳鉞)이 그들을 위해 말씀을 올리니 비로소 그 청을 허락하였다. 만도로(滿都魯)가 죽고 역시 사마(思馬)가 병권을 주도하는 바람에 삼위(三衛)가 다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성화(成化) 22(1486), 달단(韃靼)의 별부(別部)인 나해(那孩)가 삼위(三衛)를 크게 약탈하여 삼위(三衛)가 변방 근처로 도망하여 숨으니 헌종(憲宗)이 조서를 내려 이들을 넉넉하게 돌보게 하였다.하였다. 말시장(馬市)의 나머지 하나는 개원(開原) 남관(南關)에 있었고 해서(海西)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다. 一在開原南關以待海西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22, 달단(韃靼)의 별부(別部)인 나해(那孩)가 다시 삼만 무리를 거느리고 대녕(大寧)의 금산(金山)에 들어와 노하(老河)를 건너 삼위(三衛) 두목 백안(伯顏)들을 공격하여 죽이고 만()으로 계산되는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여 갔다. 삼위(三衛)가 마침내 노약자를 서로들 이끌고서 변방으로 달아나 숨었다. 변신(邊臣) 유잔(劉潺)이 이 일을 아뢰니 조서를 내려 말의 먹거리인 꼴()과 사람이 먹을 식량을 주어 넉넉하게 이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하였다.

 

효종(孝宗) 홍치(弘治, 14881505) , 삼위(三衛)가 여러 번 고북(古北), 개원(開原) 땅에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다. 얼마 있다가 소왕자(小王子)에 의해 약탈을 당하자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자기 죄를 아뢰니 이를 용서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홍치(弘治) 초에 삼위(三衛)가 늘 고북(古北), 개원(開原) 땅을 도둑질하며 약탈하였다. 이미 죄를 뉘우치고서 수신(守臣) 장옥(張玉), 총병(總兵) 이고(李杲) 들이 속임수를 두어 일을 꾸몄다는 핑계로 그 장마당에 온 300사람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북쪽으로 탈라간(脫羅干)과 우호를 맺고 죽은 이들을 위해 원수를 갚기를 청하고 자주 광녕(廣寧), 영원(寧遠)의 여러 곳을 약탈하였다. 때에 해서(海西) 땅에 상고(尚古)란 자가 명나라에 공물을 바칠 수 없자 반기를 들고서 자주 군대로서 여러 변방의 나라가 공물을 들이려고 가는 길을 막으니 여러 변방의 나라가 아울러 이를 원망하였다. 조정(朝廷)이 곧바로 상고(尚古)가 바치는 정성을 받아들이기로 허락하였다. 이에 무녕 맹극(撫寧猛克) 첩목아(帖木兒)들이 모두 상고(尚古)를 구실삼아서 요양(遼陽) 땅에 들어와 도적질하고 죽이며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얼마 있다가 달단(韃靼)의 소왕자(小王子)가 여러 차례 삼위(三衛)를 약탈하자 삼위(三衛)가 각각 관문(關門)을 두드리고서 자기 죄를 실토하였다. 조정(朝廷)이 그 뉘우침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겉으로만 공순한 체 하였을 뿐이다. 타안 도독(朵顏都督) 화당(花當)이란 자가 그 땅이 험난한 것을 믿고 교만하여 들이는 공물을 더 많게 하고서 받는 상을 더해 주기를 자주 청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였다.

 

무종(武宗) 정덕(正德) 10(1515), 타안 도독(朵顏都督)이 자기 아들 파아손(把兒孫)을 보내어, 들어와 약탈하게 하니 부총병(副總兵) 두용(杜勇)에게 명하여 이들을 막도록 명하였는데 마침내 파아손(把兒孫)을 숨겨놓고 그 아들 타합(打哈) 들을 사신으로 명나라 조정에 들여보내어 죄에 대한 벌을 받기를 청하였는데 무종(武宗)이 조서를 내려 이들을 풀어주게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덕(正德) 10, 화당(花當)이 그 아들 파아손(把兒孫)에게 기병 천 명을 딸려 보내 염어관(鯰魚關)에 들어가 훼손시키고 마란곡(馬蘭谷)을 크게 노략질하게 하였다. 참장(參將) 진건(陳乾)이 이들과 싸우다 죽었다. 다시 5백 기병을 데리고 판장곡(板場谷)에 다시 들어왔고 기병 천명이 신산령(神山嶺)으로 들어왔다. 또 천여 기병이 수계동(水開洞)으로 들어왔다. 이 일을 아뢰니 부총병(副總兵) 두용(杜勇)에 명하여 이들을 막게 하였다. 화당(花當)이 곧바로 물러나서 홍라산(紅羅山)에 주둔하고 파아손(把兒孫)을 숨겨놓고서 그 아들 타합(打哈) 들을 사신으로 명나라 조정에 들여보내 죄에 대한 벌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이들을 풀어주고 죄를 따지지 말게 하였다. 하였다.

 

정덕(正德) 13, 파아손(把兒孫)이 죽고 그 아들 백혁(伯革)이 공물을 들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덕(正德) 13, ()가 순행(巡幸)을 하여 대희봉구(大喜峰口)에 이르렀다. 장차 삼위(三衛) 두목들을 불러다 죄다 관문(關門) 아래에 나아오게 하여 잔치를 열어 위로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어사(都御史) 장봉(臧鳳) 들이 상소를 올려 이를 만류하였는데 답을 주지 않더니 조금 뒤에 역시나 장봉이 만류한 대로 하였다. 파아손(把兒孫)이 변경을 범하였을 당시에 조정(朝廷)에서 조서를 내려 그 직함을 깎아내렸다. 파아손(把兒孫)이 죽자 그 아들 백혁(伯革)이 공물을 들였다. 하였다.

 

세종(世宗) 가정(嘉靖) 9(1540), 조서를 내려 백혁(伯革)의 아버지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타합(打哈)이 자신은 직함을 얻지 못하였던 탓에 이어서 들어와 노략질하니 변장(邊將)이 방어를 잘못하여 모두 체포하여서 법으로 다스렸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9, 조서를 내려 백혁(伯革)의 아버지에게 작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런데 타합(打哈)이 자신이 화당(花當)의 아들로서, 직함을 얻지 못하고 있음에 분노하였고 마침내 이어서 냉구(冷口), 찰애(擦崖), 희봉(喜峰) 땅 사이를 노략질하였다. 참장(參將) 원계훈(袁繼勳) 들이 방어에 실패하니 모두 체포하여 법으로 다스렸다. 하였다.

 

가정(嘉靖) 17, 태녕부(泰寧部) 파당해(把當亥)가 들어와 노략질하니 총병(總兵) 마영(馬永)이 쳐서 베어 죽였다. 그 무리 파손(把孫)이 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소감왕(少監王) ()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17년 봄, 지휘(指揮) 서호유(徐顥誘)가 태녕부(泰寧部) 아홉 사람을 살해하니 그 두목 파당해(把當亥)가 무리를 이끌고 대청보(大清堡)를 노략질하였는데 총병(總兵) 마영(馬永)이 쳐 베어 죽였다. 그 무리 파손(把孫)이 타안부(朵顏部) 무리를 데리고 다시 들어오니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고 있던(鎮守) 소감왕(少監王) ()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다. 하였다.

 

가정(嘉靖) 22, 조서를 내려 시마(馬市)와 목마(木市, 목재를 교역하던 시장)를 그만두게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22년 겨울, 묘전곡(墓田谷)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수비하고 있던 진순(陳舜)을 죽이니 부총병(副總兵) 왕계조(王繼祖) 들이 달려와 구원하여 30여 사람의 목을 베었다. 그 해에, 조서를 내려 옛날에 마련하였던 삼위(三衛)의 마시(馬市)를 그만두고 아울러 새로 마련하였던 목시(木市) 역시 그만두게 하였다. 가을, 삼위(三衛)가 다시 달단(韃靼)에 길잡이를 하여 요주(遼州)를 노략질하고 사하보(沙河堡)로 들어가니 수장(守將) 장경복(張景福)이 전투하다 죽었다. 삼위(三衛)가 갈마들며 침범한 것은 실제 타안부(朵顏部)의 합주아(哈舟兒), 진통사(陳通事)가 이 일을 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중원 땅 사람인데 포로로 잡히어 마침내 삼위(三衛)에게 쓰여진 것이다. 하였다.

 

가정(嘉靖) 24, 타안 도독(朵顏都督)에게 금띠와 모자 꼭지를 금으로 만든 큰 모자를 하사하였다.

 

명회전(明會典)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24, 타안 도독(朵顏都督)이 능히 사람을 억눌러 단속하여 변경 지역을 소란스럽지 않게 잘하였기 때문에 금띠(金帶)와 모자 꼭지를 금으로 만든 큰 모자를 주라고 윤허하였다. 답례(回賜)로 자진해서 선사할 말들을 아울러 데리고 오면 말들의 등급을 따지지 않고 매 한 마리에 고급 비단(綵段) 안감 겉감(表里) , 비단() 한 필을, 낙타()는 각 한 마리에 안감 겉감 옷감 셋, 비단() 열 필을 주었다. 위도독(衛都督), 도지휘(都指揮) 각 인원에 고급 비단(綵段) 옷감의 겉감 안감(表里) 하나를 더해 주었고토벌을 요구하고 천자의 하명을 청한 경우, 사안을 헤아려 물건(物件)을 주었다. 경사(京師)에 이른 경우, 명분에 비추어 물자를 내주었다. ()에 사람이 칙령대로 물건을 내주기를 청하여 물건을 가져다줄 사람을 보내어 받아 갔다. 상을 받기를 다 마친 날, 회동관(會同館, 변방 지역 나라들의 공물을 운반하던 사신(貢使))에서 3일 동안 장마당을 열게 하였다. 점포 장사와 행상들은 으레 하던 대로 재화를 가지고서 관()에 들어와 양편이 공평하게 교역을 하였다.교역이 끝나고 순천부(順天府)에서는 그대로 계주(薊州)와 준화(遵化) 등지를 다니다가 만약 삼위(三衛)의 사람들은 있으면 저쪽으로 돌아가고 양측의 공평한 교역 영()을 듣도록 하였다. 각 사람은 소 한 마리, 쟁기(犁鏵) 하나, 솥 하나를 사가질 수 있고 금지한 물건을 사사로이 가지고 와서 매매함을 불허하였다. 이를 어기는 자는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 죄를 캐어내 다스렸다.하였다.

 

가정(嘉靖) 30(1551), 합주아(哈舟兒)가 벌을 받았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29, 달단(韃靼)의 엄답(俺答)이 기전 동쪽(畿東, 지금 북경 지역)을 침범하기로 모의하였을 때, 합주아(哈舟兒)가 엄답에게 조하천로(潮河川路)를 가리켜 보여주어 엄답(俺答)이 백묘(白廟)로 군대를 옮겨두니 고북(古北)에 가까웠다. 주아(舟兒)가 속여 말하기를 ()이 이미 물러났다.” 하여 변경의 수비가 느슨해졌고, 엄답(俺答)이 마침내 합자동(鴿子洞), 조유구(曹榆溝)를 밟아서 들어와 곧장 기전(畿甸)을 침범하였다. 얼마 뒤에 엄답(俺答)이 마시(馬市)를 열기를 명나라 조정에 청하였는데 주아(舟兒)가 다시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속임수를 써서 막았다. 30년 계요 총독(薊遼總督) 하동(何棟)이 그에게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여 경사(京師)에 이르러 벌을 받았다. 가정(嘉靖) 42년 타안(朵顏)의 통한(通罕)이 엄답(俺答)의 길잡이를 하여 순의(順義, 지금 북경시)와 삼하(三河, 하북성)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타안(朵顏)의 통한(通罕)이란 사람은 엄답(俺答) 아들 신애(辛愛) 처의 아버지이다. 가정(嘉靖) 42, 고북(古北) 땅에서 보초를 보던 병사(哨卒)가 관문을 나가다 타안(朵顏)에게 맞아죽었다. 조금 뒤에 통한(通罕)이 관문을 두드리고 상()을 요구하였는데 부총병(副總兵) 호진(胡鎮)이 병사를 잠복시켜 이들을 잡았다. 총독(總督) 양선(楊選)이 장차 신애(辛愛)를 제재할 계산으로 곧 통한(通罕)을 구금하고 그의 여러 아들을 돌아가면서 인질로 삼게 하였다. 삼위(三衛)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더니 마침내 엄답(俺答)에 길잡이를 노릇을 하여 순의(順義)와 삼하(三河)에 들어와 노략질하니 죄지을 일만 골라 하였다.

 

신종(神宗) 만력(萬曆) 12(1584), 타안(朵顏)의 장앙(長昂)이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157316207) 초에 타안(朵顏)의 장앙(長昂)이 더욱 강성하여서 명나라를 위한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음에도 별도의 상(挾賞)을 받지 못하자 자주 그 붙이인 동고리(董孤狸)들과 무리를 규합하여 들어와 약탈하고 여러 변방에 울타리 나라들의 공물 길(貢道)을 끊었다. 12년 가을, 다시 토만(土蠻)의 길잡이를 하여 4천 기병을 나누어 삼산(三山), 삼도구(三道溝), 금주(錦州) 여러 곳을 약탈하였다. 수신(守臣) 이송(李松)이 서둘러 장앙(長昂) 들을 소탕하기를 청하였지만, 명나라 조정이 의견을 따르지 않고 겨우 그달에 내리려고 하였던 상()만을 없앴다. 얼마 지나자 다시 기병 천명으로써 유가구(劉家口)를 침범하니 관군이 이를 막아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그 숫자가 서로 같았다. 이에 장앙(長昂)이 더욱 제멋대로 방자하게 날뛰었고 동쪽으로 토만(土蠻)을 자기편으로 끌어넣었으며 서쪽으로 백홍대(白洪大)와 혼인을 맺어서 여러 변경 지방을 소란하게 하였다. 하였다.

 

만력(萬曆) 17, 장앙(長昂)이 요동(遼東) 땅을 노략질하였다. 총병(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이를 막아서 관군이 크게 이겼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17, 타안(朵顏)의 장앙(長昂)이 달단(韃靼)의 동()과 서(西) ()와 연합하여 요동(遼東) 땅을 노략질하였다. 총병(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이를 쫓아갔고 관군(官軍)이 크게 이겨 섬멸한 자가 팔백 사람이었다.

 

만력(萬曆) 19, 장앙(長昂)이 독석로(獨石路)를 크게 약탈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2, 장앙(長昂)이 중후소(中後所)를 노략질하였다.”라고 운운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2, 장앙(長昂)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중후소(中後所)를 침범하여 소둔대(小屯臺)를 공격하여 들어갔다. 부총병(副總兵) 조몽린(趙夢麟), 진득의(秦得倚)들이 힘껏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하였다.

 

만력(萬曆) 23, 장앙(長昂)이 몰래 희봉구(喜峰口)로 들어갔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3, 장앙(長昂)이 몰래 희봉구(喜峰口)로 들어갔는데 관군이 그 두목 소랑아(小郎兒)를 체포하였다.

 

만력(萬曆) 29, 장앙(長昂)이 동고리(董孤狸) 들과 더불어 모두 그 정성(선물)을 들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9, 장앙(長昂)이 동고리(董孤狸) 들과 더불어 모두 그 정성(선물)을 들이고, 다시 영전(寧前)의 목시(木市)를 열기를 청하였더니 이를 허락하였다.

 

만력(萬曆) 34, 장앙(長昂)3천 기병을 데리고 의원(義院)의 경계를 엿보았는데 변장(邊將)이 방비하고 있어서 결국 기병을 이끌고 떠났다. 얼마 있다가 장앙(長昂)이 죽자 삼위(三衛)가 모두 안정되었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34년 겨울, 다시 달단(韃靼)의 반불습(班不什), 백언태길(白言台吉)들을 규합하여서 만명의 기병(萬騎)을 데리고 산해관(山海關)에 들이닥칠 판이었는데 총병(總兵) 강현모(姜 顯謨)가 이들을 쳐 달아나게 하였다. 장앙(長昂)이 다시 3천의 기병을 데리고 희원(義院) 경계를 엿보고 있었는데 변장(邊將)이 방비하고 있어서 결국 기병을 이끌고 떠났다. 곧 희봉(喜峰)에 나아가 스스로 (, 班不什)과 백(, 白言台吉)이 들어와 노략질하였을 때, 자신은 미리 알지 못하였다.”라고 아뢰었고 수신(守臣)이 이 말을 위에다 다 아뢰었다. 조서를 내려 장앙(長昂)이 다시 지정된 곳에서 무역(貢市)을 할 수 있게 하고 위로와 상을 내리기를 으레 하던 대로 하였다. 얼마 있다가 장앙(長昂)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조금씩 힘을 잃어갔지만, 삼위(三衛)가 모두 안정되었다.

 

欽定古今圖書集成/方輿彙編/邊裔典/124

山戎部彙考一 厙莫奚 兀良哈 朵顏福餘泰寧三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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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朵顏福餘泰寧高皇帝 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種類元為大寧路北 境高皇帝有天下東蕃遼王惠寧王朵顏元帥府相 率乞內附于是即古會州地置大寧都司營州諸衛封子權為寧王使鎮焉已數為韃靼所抄。」

 

明會典》:「朵顏衛福餘衛泰寧衛兀良哈即古山戎後稱厙莫奚在烏龍江南漁陽塞北元時大寧路北 境國初設北平行都司洪武十四年以大寧地封子 權為寧王二十一年遼王惠寧王朵顏元帥府元帥 等各遣使來朝。」

 

洪武二十二年始置泰寧朵顏福餘三衛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洪武二十二年乃置泰 寧朵顏福餘三衛指揮使司俾其頭目各自領其眾以為聲援自大寧前抵喜峰口近宣府曰朵顏自錦 義歷廣寧至遼河曰泰寧自黃泥窪逾瀋陽鐵嶺至 開原曰福餘獨朵顏地險而強久之皆叛去。」

 

明會典》,「二十二年乃分兀良哈為三衛於橫水之 北曰朵顏曰福餘曰泰寧以處降胡授指揮使等官各賜冠帶俾領所部朵顏福餘泰寧三衛差來并自 來都督賞綵段四表裏絹二匹都指揮綵段三表裏絹二匹指揮千百戶所鎮撫頭目每人綵段二表裏絹一匹各織金紵絲衣一套又各加綵段一表裏每人綵段二表裏絹一匹織金衣一套達子每人 綵段一表裏絹一匹素紵絲衣一套婦女有進貢者每人一表裏絹一匹紵絲女衣一套隨來婦女一表 裏絹一匹女衣一套以上靴襪各一雙奏事進貢都 指揮絹一匹綵段三表裏織金衣一套指揮每人絹 一匹綿布一匹綵段二表裏紵絲衣一套靴襪各一 雙舍人因事進貢者每人綵段一表裏織金衣一套絹一匹靴襪各一雙

 

明一統志》:「兀良哈東接海西連開平界北抵北海本春秋時山戎地秦為遼西郡北境漢為奚酋所據東漢征敗之走匿松漠間後魏之先復居於此號厙 莫奚後服屬契丹元為大寧路北境本朝洪武二十 二年征敗北胡來降者眾詔以兀良哈之地置泰寧朵顏福餘三衛以處之為東北外藩命其長為指揮使指揮同知各領所部自是每歲朝貢

 

仁宗洪熙元年詔三衛許自新福餘衛奏印為賊所奪請印許之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仁宗嗣位詔三衛許自 新洪熙元年安出奏其印為寇所奪請更給許之三衛頭目阿者禿來歸授千戶賜鈔幣襲衣鞍馬仍 命有司給供具自後來歸者悉如例。」

 

宣宗宣德元年三衛掠永平山海帝將親討之三衛謝罪撫之如初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宣宗初三衛掠永平山 海間帝將親討之三衛頭目皆謝罪入貢朝廷撫納 之如初。」

 

明會典》:「兀良哈宣德間使臣朝貢沿途茶飯接待宣德七年以三衛頭目恭事日久加賜金幣有差。」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宣德七年更給泰寧衛 印其秋以朵顏頭目哈剌哈孫福餘頭目安出泰寧頭目脫火赤等恭事朝廷久加賜織金綵幣表裏有 差。」

 

英宗正統 年三衛入寇潛附瓦剌也先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間屢寇遼東大同延安境獨石守備楊洪擊敗之擒其頭目朵欒帖木 兒未幾復附瓦剌也先泰寧拙赤妻也先以女皆陰 為之耳目入貢輒易名且互用其印又入廣寧前屯帝惡其反覆。」

 

正統九年命成國公朱勇等征三衛敗之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九年春命成國公 朱勇偕恭順侯吳克忠出喜峰興安伯徐亨出界嶺都督馬亮出劉家口都督陳懷出古北各將精兵萬 人分勦之勇等捕其擾邊者致闕下并奪回所掠人 畜未幾拙赤等拘肥河衛使人殺之肥河衛頭目別 里格與戰于格魯坤迭連拙赤大敗瓦剌復分道截出兵攻之三衛大困

 

正統十二年總兵曹義等擊敗三衛瓦剌復大掠之乞降于也先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十二年春總兵曹 義參將胡源都督焦禮等分巡東邊值三衛入寇掠 擊之共斬首三十二級擒七十餘人其年瓦剌賽刊 王復擊殺朵顏乃兒不花大掠以去也先繼至朵顏泰寧皆不支乞降而福餘獨走避腦溫江于是三衛 益衰畏瓦剌強不敢背仍歲來致貢止以利中國賜賚而已又心銜邊將勦殺故常潛圖報復

 

正統十四年石亨等擊敗三衛三衛導瓦剌大舉入 寇上以是役北狩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十四年夏大同參 將石亨等復擊其盜邊者于箭谿山擒斬五十人三 衛益怨其秋導瓦剌大入英宗遂以是役北狩。」

 

代宗景泰 年遣使撫諭三衛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景泰初朝廷仍遣使撫 諭三衛受也先旨數以非時入貢多遣使往來伺察 中國既而也先虐使之復逼徙朵顏所部于黃河母 納地三衛皆不堪遂陰輸瓦剌情于中國而請得近 邊屯駐舊制三衛每歲三貢其貢使俱從喜峰口驗 入有急報則許進永平時三衛使有自獨石及萬全右衛來者邊臣以為言敕止之

 

憲宗成化元年三衛朵羅干入寇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天順中嘗乘間掠諸邊復竊通韃靼孛來每為之鄉導所遣使與孛來使臣 偕見中國待韃靼厚請加賞不得大忿遂益與孛來 相結成化元年其頭目朵羅干等以兵從孛來大入 遼河復西附毛里孩東合海西兵數入塞又時獨 出沒廣寧義州間。」

 

成化九年三衛入寇遼東總兵歐信敗之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九年遼東總兵歐 信以偏將韓斌等敗之于興中追及麥舟斬首六十 二獲馬畜器械幾數千其年喜峰守將吳廣以貪賄 失三衛心三衛入犯廣下獄死。」

 

成化十年三衛入寇開原慶雲參將周俊卻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十年復掠開原慶 雲參將周俊擊退之。」

 

成化十四年詔復三衛馬市。」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十四年詔復三衛 馬市國家設遼東馬市三一城東一廣寧皆以待 三衛正統間以其部眾屢叛罷之會韃靼滿都魯暴 強侵掠三衛三衛頭目皆走避塞下數饑困請復馬 市再四不許至是巡撫陳鉞為上言始許之滿都魯 死亦思馬因主兵柄三衛復數為所窘。」

 

成化二十二年韃靼別部那孩大掠三衛三衛逃匿 近邊詔優卹之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二十二年韃靼別 部那孩復擁三萬眾入大寧金山涉老河攻殺三衛 頭目伯顏等掠去人畜以萬計三衛乃相率攜老弱 走匿邊圉邊臣劉潺以聞詔予芻糧優卹之。」

 

孝宗弘治  年三衛數盜入古北開原境未幾為小王子所掠因叩關輸罪宥之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弘治初三衛常盜掠古 北開原境既悔罪而守臣張玉總兵李杲等以計誘 斬其來市者三百人遂北結脫羅干請為復仇數寇 廣寧寧遠諸處時海西尚古者以不得通貢叛中國數以兵阻諸蕃入貢諸蕃並銜之朝廷旋許尚古納 款于是撫寧猛克帖木兒等皆以尚古為辭入寇遼殺掠甚眾未幾韃靼小王子屢掠三衛三衛因各 叩關輸罪朝廷許之然陽為恭順而已朵顏都督花 當者恃險而驕數請增貢加賞不許

 

武宗正德十年朵顏都督遣其子把兒孫入寇命副總兵杜勇禦之乃匿把兒孫使其子打哈等入朝請罪詔釋之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德十年花當遣其子把兒孫以千騎毀鯰魚關入大掠馬蘭谷參將陳乾戰死復以五百騎入板場谷千騎入神山嶺又千餘 騎入水開洞事聞命副總兵杜勇禦之花當旋退去屯駐紅羅山匿把兒孫而使其子打哈等入朝請罪詔釋不問。」

 

正德十三年把兒孫死其子伯革入貢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德十三年帝巡幸至 大喜峰口將徵三衛頭目使悉詣關下宴勞都御史 臧鳳等疏止之不報尋亦不果當把兒孫犯邊時朝 廷詔削其職把兒孫死其子伯革入貢。」

 

世宗嘉靖九年詔予伯革父爵而打哈自以不得職先後入寇邊將失防禦皆逮治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九年詔予伯革父 爵而打哈自以花當子不得職遂先後掠冷口擦 崖喜峰間參將袁繼勳等失于防禦皆逮治。」

 

嘉靖十七年泰寧部把當亥入寇總兵馬永擊斬之其屬把孫入寇少監王永與戰敗績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十七年春指揮徐 顥誘殺泰寧部九人其頭目把當亥率眾寇大清堡總兵馬永擊斬之其屬把孫以朵顏部眾復入鎮守 少監王永與戰敗績。」

 

嘉靖二十二年罷馬市及木市。」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二十二年冬攻圍 墓田谷殺守備陳舜副總兵王繼祖等赴援擊斬三 十餘級其年詔罷舊設三衛馬市并新設木市亦罷 之三衛復導韃靼寇遼州入沙河堡守將張景福 戰死。」三衛之迭犯也實朵顏部哈舟兒陳通事為之二人者俱中國人被鹵遂為三衛用

 

嘉靖二十四年賜朵顏都督金帶金頂大帽

 

明會典》:「嘉靖二十四年以朵顏都督能鈐束人不 擾邊境准與金帶及金頂大帽回賜自進并帶進馬 匹不分等第每匹綵段二表裏絹一匹駝每隻三表 裏絹十匹在衛都督都指揮每員加賜綵段一表裏求討請旨量與物件到京者照名給散在衛者請敕 開付差來人領去領賞畢日許於會同館開市三日。」 鋪行人等照例將貨入館兩平交易順天府仍行薊 州遵化等處如三衛人回還到彼聽令兩平交易每 人許收買牛一隻犁鏵一副鍋一口不許將違禁之 物私自夾賣違者巡按御史究治

 

嘉靖三十年哈舟兒伏誅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二十九年韃靼俺 答謀犯畿東哈舟兒為指潮河川路俺答移兵白廟近古北舟兒詐言敵已退邊備緩俺答遂由鴿子洞曹榆溝入直犯畿甸俺答請開馬市舟兒復往來 誘阻之三十年薊遼總督何棟購捕至京伏誅。」 嘉靖四十二年朵顏通罕導俺答入掠順義三河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朵顏通罕者俺答子辛 愛妻父也嘉靖四十二年古北哨卒出關為朵顏所 撲殺通罕叩關索賞副總兵胡鎮伏兵執之總督 楊選將為牽制辛愛計乃拘縶通罕令其諸子更迭 為質三衛恨甚遂導俺答入掠順義及三河選得罪。」

 

神宗萬曆十二年朵顏長昂入寇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初朵顏長昂益強挾賞不遂數與其屬董孤狸等糾眾入掠截諸蕃貢 道十二年秋復導土蠻以四千騎分掠三山三道溝錦州諸處守臣李松請急勦長昂等朝議不從僅革 其月賞未幾復以千騎犯劉家口官軍禦之殺傷相 當于是長昂益跋扈自恣東勾土蠻西結婚白洪大」, 以擾諸邊

 

萬曆十七年長昂寇遼東總兵李成梁禦之官軍敗 績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十七年朵顏長昂 合韃靼東西二部寇遼東總兵李成梁逐之官軍大 敗殲者八百人。」

 

萬曆十九年長昂大掠獨石路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云云

 

萬曆二十二年長昂寇中後所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二十二年長昂復 擁眾犯中後所攻入小屯臺副總兵趙夢麟秦得倚 等力戰卻之。」

 

萬曆二十三年長昂潛入喜峰口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二十三年長昂潛 入喜峰口官軍擒其頭目小郎兒。」

 

萬曆二十九年長昂與董孤狸等皆納款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二十九年長昂董 孤狸等皆納款請復寧前木市許之。」

 

萬曆三十四年長昂以三千騎窺義院界邊將有備乃引去頃之長昂死三衛皆靖

 

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三十四年冬復糾 韃靼班不什白言台吉等以萬騎迫山海關總兵姜 顯謨擊走之長昂復以三千騎窺義院界邊將有備乃引去旋詣喜峰自言班白入寇已不預知守臣具 以聞詔長昂復通貢市頒給撫賞如例頃之長昂死諸子稍衰三衛皆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