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고금고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方輿彙編) 변예전(邊裔典) 제124권 하
산융부 휘고(山戎部彙考) 2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요연경지중경도리고(遼燕京至中京道里考)》
송(宋) 왕증(王曾)의 《상거란사(上契丹事)》에서 말하기를 「연경(燕京) 북문(北門)을 나와서 망경관(望京館)에 이르면 50리를 가 순주(順州)에 이르고 70리를 가 단주(檀州)에 이르는데 점차 산으로 들어가며 50리를 가 금구관(金溝館)에 이른다. 장차 금구관(館)에 이를 때, 내(川)와 들(原)이 편편하고 넓어지니 이를 일러 금구정(金溝淀)이라 한다. 여기에서부터 산으로 들어가는데 구불구불 위로 올라가면서 이정 표시(里堠)가 더는 없어 단지 말 걸음으로써 날짜를 기록하였다. 그 거리 숫자를 대략 따져보면 90리를 가 고북구(古北口)에 이르는데 양쪽에 깎아지른 벼랑은 겨우 수레바퀴를 용납할 따름이다. 또 덕승령(德勝嶺)을 넘어서면 굽이진 좁은 길 여러 층이 나오는데 민간에서는 사향령(思鄉嶺)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80리를 가 신관(新館)에 이르고 조과령(雕窠嶺), 편창령(偏槍嶺)을 지나 40리를 가면 여래관(如來館)에 이르고 오락하(烏濼河)를 지나면 동쪽에 난주(灤州)가 있다. 다시 흑두령(黑斗嶺), 도운령(度/渡雲嶺), 근채령(芹菜嶺)을 지나 70리를 가면 유하관(柳河館, 하북 난평현(灤平縣) 동북 홍기진(紅旗鎮) 근처), 송정령(松亭嶺)에 이르는데 매우 험준하다. 70리를 가면 타조부락(打造部落)에 이른다. 동남(東南)으로 50리를 가면 우산관(牛山館)에 이르고 80리를 가면 녹아협관(鹿兒峽館)에 이르며 하마령(蝦蟆嶺)을 지나 90리를 가면 철장관(鐵漿館)에 이르고 석자령(石子嶺)을 지나면 여기에서부터 점차 산을 벗어나게 된다. 70리를 가면 부곡관(富谷館)에 이르고 80리를 가면 통천관(通天館)에 이르며 20리를 가면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에 이른다. 대정부의 성(城) 담은 낮고 아담한, 모나거나 둥글어 겨우 4리 남짓하며 문(門)은 그저 이층 지붕으로 지었을 뿐, 망루를 짓는 법이 없다. 남문(南門)은 “주하문(朱夏門)”이라 부른다. 안으로 보랑(步廊, 복도)에 통하며 방문(坊門, 방문은 ‘민가가 있는 거리로 통하는 문’인지 아니면 관청 부서 전용의 성질을 띤 별실인지 모르겠다)이 많다. 또 장마당을 감찰하는 누각(市樓)이 넷이 있는데 각각 “천방(天方)”, “대구(大衢)”, “통환(通闤)”, “망궐(望闕)”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대동관(大同館)에 이른다. 그 문 정북(正北)의 것을 “양덕창합(陽德閶闔)”이라 부른다. 성(城) 서쪽 안, 서남 모퉁이 언덕배기에 절이 있고 성(城) 남쪽에 울안밭(園圃)과 잔치를 벌이며 화살을 쏘는 곳(宴射)이 있다. 북쪽 어귀(北口, 곧 古北口)를 지나고부터 사람들이 풀로 만든 암자와 판자 지붕 집에서 살며 농사를 짓는데 다만 뽕나무와 산뽕나무(桑柘)만은 심지 않고 모두 언덕 위(壟上)에다 씨를 뿌리니 모래가 불어 씨들이 묻힐까 염려해서이다. 산 안에 긴 소나무가 빼곡하고 깊은 골짜기 안에는 때때로 놓아 기르는 소, 말, 낙타가 보이며 푸른 소금(青鹽)과 누런 돼지(黃豕)가 많다.
*천광(天慶) 원년 1111년 때 요나라 중경(中京) 묘사 지도(바이두)
《원사지리지(元史地理志)》
《대녕로 소속 주현고(大寧路所屬州縣考)》
대녕로(大寧路):〈상(上)이다.〉 본래 해 겨레의 부락(奚部)이었다. 당(唐) 초에 그 땅은 영주(營州)에 소속되었고 정관(貞觀, 627년 – 649년) 중에 해추(奚酋) 가도(可度)가 당나라에 붙어 이에 효락군(驍樂郡)을 설치하였다. 요(遼)나라가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를 만들었고 금(金)이 이를 그대로 받았다. 원(元) 초에 북경로(北京路) 총관부(總管府)를 만들어 중흥부(興中府, 이전에는 유성(柳城), 요나라 때는 패주창무군(霸州彰武軍)이었다. 지금 요녕 서부 대릉하(大凌河) 골짜기 일대)와 의(義), 단(瑞), 흥(興), 고(高), 금(錦), 리(利), 혜(惠), 천(川), 건(建), 화(和) 이 열 주(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중통(中統, 원나라 세조(世祖)의 연호) 3년(1262년)에 흥주(興州)와 송산현(松山縣)을 갈라서 상도로(上都路)에 소속시켰다. 지원(至元, 원나라 혜종(惠宗)의 연호) 5년(1339년), 화주(和州) 땅 모두를 이주(利州)에 편입하여 영화향(永和鄉)을 만들었다. 7년, 흥중부(興中府)를 내려 부(府)에서 주(州)로 만들고 그대로 북경(北京)에 예속시키고 북경(北京)이라는 이름을 고쳐 “대녕(大寧)”이라 하였다. 25년, 무평로(武平路)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녕(大寧)이라 하였다. 영사(領司) 하나, 현(縣) 일곱, 주(州) 아홉이었다. 녹사사(錄事司, 성시(城市)와 민간인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치를 담당한 관서), 초기에 경순원(警巡院, 지방의 치안과 소송 사건 담당한 기관)을 두었는데 지원(至元) 2년에 녹사사(錄事司)로 고쳐 설치하였다.
현(縣) 일곱이다.
대정(大定), 하(下)이다. 중통(中統) 2년(1261년), 장흥(長興)을 줄여서 대정(大定)에 편입시켰다.
용산(龍山), 하(下)이다. 초기에 대정부(大定府)에 소속되었다가 지원(至元) 4년, 이주(利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본래대로 귀속시켰다.
부서(富庶), 하(下)이다. 지원(至元) 3년에 줄여서 흥중주(興中州)로 편입시켰다가 뒤에 다시 설치하였다.
화중(和眾), 하(下)이다.
금원(金源), 하(下)이다.
혜화(惠和), 하(下)이다.
무평(武平), 하(下)이다.
주(州)가 아홉이다.
의주(義州), 하(下)이다.
흥중주(興中州), 하(下)이다. 원(元) 초기에 예전 그대로 흥중부(興中府)를 두었다가 뒤에 줄였고, 지원(至元) 7년에 다시 부(府)로 하였던 것을 강등하여 주(州)로 만들었다.
단주(瑞州), 하(下)이다. 지원(至元) 23년에 백안(伯顏)이 말씀을 올려 승인을 받았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도(唆都), 합태(哈䚟) 등을 호계(戶計, 여러 종족의 인가를 총칭함. 원나라 때 정착민과 유목민의 관습을 참작하여 각지의 실정에 따라 알맞게 제도를 만든 호계(戶計) 제도를 세웠다. 사람들은 계급, 직업, 종교 등에 따라서 다양한 호계(戶計)에 편입시켰고 세습되며 변경될 수 없었다)와 논밭을 취하고 모아서 단주(瑞州) 서쪽에다 주둔지를 세우고 之西,撥바다 가까이 황무지와 때때로 농사짓는 땅을 할당하여 타포둔전총관부(打捕屯田總管府, 국가 땅에서 한 해의 작황 수입과 사냥, 낚시로 잡은 것들은 궁중에 이바지하는 일을 담당)을 설치하고서 그대로 사도(唆都)와 합태(哈䚟) 들로서 둔전관(屯田官)을 삼는다.」
고주(高州), 하(下)이다.
금주(錦州), 하(下)이다.
이주(利州), 하(下)이다.
혜주(惠州) 하(下)이다.
천주(川州), 하(下)이다.
건주(建州), 하(下)이다.
*원나라때 대녕로(大寧路) 지도
*원나라 때 대녕로, 흥중주(興中州) 지도 (바이두)
《명실록(明實錄)》
《삼위건치연혁고(三衛建置沿革考)》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20년(1387년) 가을 9월, 북평행도지휘사(北平行都指揮使司)를 대녕(大寧)에 설치하였다. 22년 봄 정월 임오(壬午), 회령후(會寧侯) 장온(張溫)과 주흥(周興)이 말씀 올리기를 「대녕(大寧) 등에 성(城)을 손보고 넓히기를 마쳤습니다.」 하였다. 우물에 건축물의 규모, 형상과 구조에 대해 알리기를 「대녕성(大寧城)은 문이 다섯이고 성(城) 둘레는 3천 60장(丈)이고 해자(濠) 길이는 3천 1백 60장(丈)이며 깊이는 1장(丈) 9척(尺)이다. 회주성(會州城)은 문이 넷이고 성(城) 둘레는 1천 1백 28장(丈)이고 해자 길이는 1천 1백 8십9장(丈) 2척(尺)이며 깊이는 1장(丈) 8척(尺)이다. 부욕성(富峪城)은 문이 넷이고 성(城) 둘레는 9백 장(丈)이고 해자 길이는 9백 8장(丈) 2척(尺)이며 깊이는 1장(丈) 3척(尺)이다. 관하성(寬河城)은 문이 넷이고 성(城) 둘레는 8백 12장(丈)이고 해자 길이는 8백 5십 9장(丈)이며 깊이는 1장(丈) 5척(尺)이다. 」 하였다.
여름 5월 신묘(辛卯)에 태녕(泰寧), 복여(福餘), 타안(朵顏) 삼위(三衛)를 올량합(兀良哈)에 설치하였으니 그 땅은 오룡강(烏龍江) 남쪽, 노룡새(盧龍塞) 북쪽에 있으니 이것으로써 항복한 부락(降部)을 살게 하였다. 「동쪽으로 전영(全寧, 그 위치는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요락수(饒樂水)나 황수(潢水) 등으로도 불림. “누런 물”이라는 뜻) 이남, 적봉(赤峰) 이북이다)에서부터 희봉(喜峰) 바깥에 닿고 선부(宣府) 가까이까지를 “타안(朵顏)”이라고 하였다.
금주(錦州), 의주(義州)로부터 광령(廣寧)을 밟아 요산(遼山)에 이르는 곳을 “태녕(泰寧)”이라고 하였다. 황니와(黃泥窪)에서부터 심양(瀋陽), 철령(鐵嶺) 넘어까지를 “복여(福餘)”라 하였다.
황수(潢水) 북쪽, 대녕(大寧) 밖 변방에서는 냉구(冷口)를 말미암아 공물을 들였다. 천안현(遷安縣)에 역을 설치하였으니 역마다 이어져 경사(京師)에까지 도달하였다.
27년 6월 을유(乙酉), 병부(兵部)에 명하여 관리를 파견해서 북평포정사(北平布政司, 관서 이름이니 1급 행정구획이다. 뒤에 순천부(順天府)로 바뀜)에 이르러 역참(驛傳) 설치에 대해 의론하게 하였다. 대녕(大寧)에서부터 광녕(廣寧) 동로(東路)에 이르기까지 4백 85리에 10개의 역을 설치하고 중로(中路)는 북평(北平)에서 개평(開平)에 이르는 7백 65리에 14개의 역을 설치하였으며 서로(西路)는 개평(開平)에 이르는 6백 30리에 13개 역을 설치하였고 북로(北路)는 토목(土木)에서 선부(宣府)에 이르는 1백 리에 2개 역을 설치하였다.
36년 봄 정월에 마역(馬驛) 여덟 곳을 설치하였으니 “동쪽으로 양정(涼亭), 심아(沈阿), 새봉(賽峰), 황애(黃崖)이라는 네 역인데 대녕(大寧), 고북구(古北口)와 닿아있다. 서쪽으로 환주(桓州), 위호(威胡), 명안(明安), 습녕(隰寧)이라는 네 역인데 독석(獨石)과 닿아있다.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는 사이목륜하(沙爾木倫河)라고도 한다. 노합하(老哈河)와 합쳐서 서료하(西辽河)를 이루며 요하(遼河) 수계이다. 다른 이름들이 매우 많아 요락수(饒樂水), 황수(潢水), 황수(潢水), 토호진수(吐護真水), 요수(遼水), 대요수(大潦水), 거류하(巨流河) 들로도 불린다. (바이두에서 내려받음)
*위쪽에 三東, 옆쪽에 四四度와 四三度를 따라가면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시라무룬하)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이 강은 올량합 삼위의 지역 구분을 하는 데에 있어 한 역할을 한다. (NDL에서 내려받음)
*명나라 때 순천부(順天府) 지도(바이두)
건문(建文) 원년(元年, 1399년) 가을 7월 경인(庚寅), 대녕총병(大寧總兵) 유정(劉貞), 도독(都督) 진형(陳亨), 도지휘(都指揮) 복만(卜萬)이 대녕(大寧) 군사를 이끌고 호기롭게 「십만 군사 」라 하고 송정관(松亭關)을 나와 사하(沙河)에 주둔하고 준화(遵化)로 나아가 공격하는 동안 정(貞) 등이 물러나 송정관(松亭關)을 지켰다. 겨울 10월 연왕(燕王)이 대녕(大寧)을 습격하여 깨뜨리고서 영왕(寧王)과 대녕관군(大寧官軍)이 북평(北平)으로 돌아갔다.
영락(永樂) 원년(元年, 1403년) 봄 3월, 북평행도지휘사사(北平行都指揮使司)를 고쳐 「대녕도지휘사사(大寧都指揮使司)」로 하고 후부(後府,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하나인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를 줄인 말)에 예속시키고서 직예 보정부(直隸保定府)로 이사시키면서 각 위(衛)는 내지(內地)로 자리를 바꾸었으니 영주(營州) 좌우위(左右衛)를 계주(薊州)로 옮기고(다른 자료에서는 좌위(左衛)는 순의(順義) 옮겼다고 기록됨), 중위(中衛)를 평곡현(平谷縣)으로, 전위(前)를 향하현(香河縣)으로 후위(後衛)를 삼하현(三河縣)으로 각각 옮겼다.
흥주(興州) 전위(前衛)를 풍윤현(豐潤縣)으로, 후위(後衛)를 삼하현(三河縣)으로 중위(中衛)를 낭향현(良鄉縣)으로, 좌위(左衛)를 옥전현(玉田縣)으로, 우위(右衛)를 천안현(遷安縣)으로 각각 옮겼다.
대녕(大寧) 중위(中衛), 전위(前衛)와 회주(會州)의 위(衛)들을 경사(京師)로 옮기고 좌(左), 우위(右衛)를 만전도사(萬全都司, 지금 하북(河北)의 서북부 지구에 설립했던 군정(軍政) 기구)로 옮겼다. 이로 인해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가 와서 알현하며 명나라에 붙기(內附)를 더욱 요구하여서 대녕(大寧) 옛 위(故衛) 땅을 바깥 울타리(外藩, 신하의 나라)로 만들어 부렸으니, 「고북구(古北口)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곳을 타안(朵顏)으로 하였고 요동(遼東) 광녕(廣寧) 전둔위(前屯衛)에서 광녕(廣寧)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땅을 태녕(泰寧)으로 하였으며 백운산(白雲山)에서 개원(開原)에 이르는 땅을 복여(福餘)로 하였다. 한 해에 1백 사람을 허락하여 성절(聖節, 임금 생일)과 설날 아침(正旦) 두 번, 낙타와 말을 공물로 들이는 것을 참여하였고 아울러 희봉구(喜峰口)에 설치된 파총(把總, 각지의 총병(总兵) 예하와 경사(京師, 북경)을 수비하는 삼대영(三大營)에 설치하였던 하급 무관)이 주관하는 감찰을 거치게 하였으니 희봉구(喜峰口)가 바로 송정관(松亭關)이다. 삼둔(三屯, 하북성 당산시 천서현(遷西縣)에 위치)에 도달하면 난양역(灤陽驛, 천서현(遷西縣)에 위치)에서 천안(遷安) 동북 땅으로 나와 경사(京師)에서 알현하였는데 천안역(遷安驛)을 산해관(山海關)으로 옮겨서 융평후(隆平侯) 장신(張信)을 총병(總兵)으로 삼고 도림구(桃林口)을 방비하며 막게 하였다. 이 해에 동승좌위(東勝左衛, 동승의 치소는 유림현(榆林縣)에 있었으니 지금에 내몽고자치구 탁극탁현(托克托縣)이다)를 산서행도사(山西行都司)로부터 노룡현(盧龍縣, 하북성 소재)으로 옮기면서 5천호소(五千戶所, 1천 단위의 호소(戶所)가 다섯임)를 거느리게 하였고, 그 우위(右衛)를 준화(遵化)로 옮겼으며 개평 중둔위(開平中屯衛)를 원래 대녕(大寧), 사령(沙嶺)에 마련해 두었었는데 홍무(洪武, 명 태조 주원장의 연호, 1368년~1398년) 중에 진정부(真定府)를 조정하면서 난주(灤州) 의풍리(義豐里) 석성폐현(石城廢縣)으로 옮겨 설치하고서 5천 호소(戶所)를 거느리게 하였다.」
*정통(正統) 14년, 1449년 때를 묘사한 지도 (바이두)
*산서행도사(山西行都司, 산서행도지휘사사(山西行都指揮使司)) : 홍무 31년(1398년) 기준 지도(바이두)
정효(鄭曉, 명나라 때 사학자) 오학편(吾學編)에 《올량합고(兀良哈考)》
올량합(兀良哈)은 오룡강(烏龍江) 남쪽과 어양새(漁陽塞) 북쪽에 있다. 춘추(春秋) 시대에 산융(山戎)의 땅이었고 원(元)나라 때 대녕로(大寧路)라 하였다. 가구(戶) 수는 4만 6천이요 인구(口)는 4십4만8천이다. 우리나라 초에 금(錦), 의(義), 건(建), 이(利) 여러 주(州)를 요동(遼東)에 예속시키고 혜주(惠州)에 도사(都司)를 설치하여 영(營), 흥(興) 등 20여 위소(衛所)를 거느리게 하였으니 이른바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이다.
홍무(洪武) 14년(1381년), 명 태조가 아들 권(權)을 대녕(大寧)에 봉하여 영왕(寧王)으로 삼았다. 22년 올량합(兀良哈)을 나누어 황수(潢水, 시라무룬하(西拉木倫河)) 북쪽에다 삼위(三衛)를 만들었으니 타안(朵顏)이고, 복여(福餘)라 하며, 대녕(大寧)이라 하였다. 항복한 부락(部)을 살게하여 탈로홀찰아(脫魯忽察兒), 해살남해(海撒男奚), 아찰실리(阿札失里)로써 삼위(三衛)의 지휘사동지(指揮使同知)로 삼고 아울러 변경 여러 민족의 나라를 우리의 울타리로 삼았다. 정난(靖難, 1399-1402년에 있었던 왕권 다툼으로 뒤에 성조(成祖)로 등극한 주체(朱棣, 성락제)가 일으킨 싸움) 초, 맨 처음으로 대녕(大寧) 군사를 으르고 올량합(兀良哈) 여러 추장을 소집하여 부락(部落)을 이끌고서 자신의 행렬을 따르게 하였다. 올량합이 공이 있자 마침내 대녕(大寧)을 삼위(三衛)에 넘겨주고 그 땅의 제후 영왕(寧王)을 남창(南昌)으로 옮겨 봉해주었다. 徙행도사(行都司)를 보정(保定)으로 옮기고 대녕도사(大寧都司)로 만들었다. 삼위(三衛)로 하여 해마다 두 번 공물을 바치고 물건을 지키며 가지고 오는 사람을 1백 사람으로 하게 하였다. 동쪽에서 광녕 전둔(廣寧前屯)에서 일어나 희봉(喜峰)을 거쳐 선부(宣府) 가까이까지를 타안(朵顏)이라 하였고 황니와(黃泥窪)에서 심양(瀋陽),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를 복여(福餘)라 하였으며 의(錦), 금주(義州)을 밟아 요하(遼河)를 건너 백운산(白雲山)에 이르기까지를 대녕(大寧)이라 하였다. 모두 물과 풀을 따라 다니며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살았다. 삼위(三衛) 중에서 타안(朵顏)이 가장 강력하였으며 갈라 받은 땅도 가장 험하였다. 영락(永樂, 1403년 - 1424년) 중에 명나라 조정과 가장 가까이 붙었다. 선덕(宣德, 1426년 - 1435년) 때 일찍이 어양새(漁陽塞) 주위로 들어갔었는데 여러 장수를 이끌고 희봉관(喜峰關)을 나와 관하(寬河)에서 여러 노략질을 쳐 이기고 그 대추장(大酋)을 징벌하니 이후에 조금씩 온순해졌다.
⇒ 지휘사동지(指揮使同知) : 지휘동지(指揮同知) : 지휘사사지휘동지(指揮使司指揮同知)의 줄임말. 명나라 초에 요해 처를 헤아려서 그 군(郡)에 ‘소(所)’를 두고 군(郡)들을 연결하여 위(衛)을 설치하였다. 대개 5 ~ 6천 사람이 ‘위(衛)’가 되고, 1천 1백 2십 사람이 ‘천호소(千戶所)’가 되며 1백 12사람이 ‘백호소(百户所)’가 되었다고 한다.
⇒ 탈아화찰(脫兒火察) : 탈아활찰아(脫兒豁察兒)나 탈로홀찰아(脫魯忽察兒)로도 표기된다. 명나라 때 몽고 올량합부(兀良合部) 사람이다. 대대로 다연온도아(多延溫都兒, 곧 타안산(朵顏山), 또는 타운산(朵雲山))과 소목련(溯木連, 작아하(綽兒河)) 일대에 살았다. 타인온도아(朵因溫都兒)는 다연온도아(多延溫都兒)이라고도 한다. 타인(朵因), 다연(多延)은 산 이름이고 ‘온도아(温都儿)’는 몽고어로 ‘높다(高), 산, 고개(領)’를 뜻한다. 타안산(朵顏山)은 지금에 색악이제산(索嶽爾濟山)으로 요나라 때는 칠금산(七金山)이라 하였다. 흥안령의 가지 산맥으로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동북부에 있다.
⇒ 해살남답해(海撒男答奚) 또는 해살남해(海撒男奚) : 복여위(福餘衛)의 구성원이다. 몽고(蒙古) 오제엽특부(烏齊葉特部) 사람이다. 그는 성길사칸(成吉思汗, 징키스칸)의 가까운 친척 홀독라칸(忽禿剌汗)의 후손이다.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 명나라 주원장에게 밀려 몽고 초원으로 가서 원나라를 이은 나라) 초기, 명(明) 조정이 동북 몽고 지구에다 설립한 위소(衛所)인 복여위(福餘衛)의 책임관리자 였다. 해살남답해(海撒男答奚)는 1389년 명(明) 조정에서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임명을 받고서, 이끌던 부락 사람과 말을 거느렸고 아울러 1399년 - 1402년 사이에 주체(朱棣, 주원장의 넷째 아들, 곧 영락제)를 도와 영왕(寧王) 주권(朱權)의 황제 즉위 기도를 꺾어버렸다. 오제섭특(烏濟葉特)은 명대(明代)에 몽고부(蒙古部) 이름이다. 몽고황금사강(蒙古黃金史綱)에서는 “올자(兀者)”라 적었고 수정염주(水晶念珠)에서는 “오제적특(烏濟㰅特)”이라 잘못 적었다.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에서 머물며 유목 생활을 하였고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복여위(福餘衛) 역시 스스로를 “올자(兀者)”라 일컬었다)를 이루었다. 6개의 천호(千戶)를 이끌었기에 “육천 오제섭특(六千烏濟葉特)”이라 하였다.
⇒ 패아지근 아차실리(孛兒只斤 阿劄失里, 아자시리(Ajasiri)) : 또한 아자실리(阿者失里)로도 표기한다. 원(元) 조정에서 요왕(遼王)을 지냈고 명(明) 조정에서는 태녕위(泰寧衛) 수령 노릇을 하였다. 칭키스칸(成吉思汗)의 아우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이다.
⇒ 복여위(福余衛)는 땅이 옛날 옛 부여국(夫余國)에 있어서 그 이름을 썼다. 또한 「올자(兀者)」라고도 불리었다. 이 말은 만어(滿語) 「와집(窩集)」과 어원이 같으니 “숲속에 사람(林中人)”이라는 뜻이다.
⇒ 기미위소(羈縻衛所) : 진나라부터 때 설치된, 중원 변방에 사는 여러 민족 땅에 설치한 지방 기구. 해당 지역의 수령을 통하여 그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관리하였다. 명나라 때는 도독(都督), 도지휘(都指揮), 천백호(千百戶), 진무(鎮撫) 등 관직을 두고 아울러 칙서(敕書, 황제가 신하들에게 관직에 임명하고 작위를 내리며 훈계의 말을 담은 문서)와 도장을 주어 해당 지역의 군정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행정체계를 본받아, 설치한 관청은 각 부족이 세습하였고 해당 지역에 군정(軍政)은 하나같이 그 관리를 받았다. 각 관청은 그 무리를 거느리며 풍습에 따라 다스리며 병부(兵部)에 직접 예속시켰으니 지금에 자치구에 해당이 된다.
홍무(洪武) 22년(1389년) 기미위(羈縻衛)를 설치하였다. 그 관할 구역은 처음에는 지금에 흑룡강성(黑龍江省) 눈강(嫩江) 하류 일대였으니 그 수령은 칭기스칸(成吉思汗)의 아우 철목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이다. 동몽고(東蒙古)와 와랄(瓦剌, 서몽고)의 여러 부(部)의 압박을 피하여 선덕(宣德)과 정통(正統) 후에 남으로 옮겨와 지금에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심양(瀋陽), 철령(鐵嶺), 개원(開原) 등에 시현(市縣) 일대에 이르렀다. 1424년, 과이심부(科爾沁部)가 와랄(瓦剌) 탈환(脫歡)에 공격을 받고 깨져 복여위(福余衛)로 달아나 몸을 맡겼다. 복여위(福余衛) 수령 자리가 알적근 계(斡赤斤系)에서 합살이 계(哈薩爾系, 칭기스칸의 둘째 동생(二弟)인 야속해(也速該)의 둘째 아들 이름)로 바뀌었다. 뒤에 몽고 제부(蒙古諸部)가 명조(明朝)의 요동(遼東) 일대를 침입하여 소란을 피웠을 때 함께 참여하였다. 16세기 중엽 후, 과이심부(科爾沁部)에 병탄이 되었다. (바이두)
정통(正統, 명나라 6대 임금 영종 때의 연호, 1436년~1449년) 중에 다시 반기를 들고 동북관(東北關)의 여러 울타리를 침범하여 약탈하며 그저 소금과 쌀, 상금(賞賜, 어떤 일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듯)을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희봉(喜峰)과 밀운(密雲) 사이에 도지휘(都指揮)나 도독진수(都督鎮守)를 두고서 공물을 들이는 이(貢夷)를 검색하게 하였다. 기사(己巳)에 복여(福餘), 대녕(大寧)이 야선(也先)과 한패가 되어 야선(也先)을 위해 길잡이를 하는데 타안(朵顏)만은 그들의 험지를 지키고서 기꺼이 따르지 않으니 야선(也先)이 이르렀음에도 새(塞)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사태가 이롭지 못하자 복여(福餘)와 대녕(大寧)의 사람과 가축들을 크게 약탈하여서 떠났다. 이때 비로소 도어사(都御史) 추래학(鄒來學)에게 칙령을 내려, 계획을 세워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태감(太監), 참장(參將, 명나라 때 처음 설치. 변경 요새에 주둔하면서 군사업무를 수행)을 두었고 다시 총병(總兵, 변경을 지키는 총병관에 총병과 부총병이 있다)을 마련하였다. 경태(景泰) 4년(1453년), 수신(守臣, 제후가 황제에게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이름)이 말하기를 「올량합(兀良哈)의 공물을 들이는 사신(貢使)들 왕래가 끊임이 없는데 와랄(瓦剌)의 간첩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이후로 사신이 이르게 되면 두세 사람만 경사(京師)에 들어오게 하고 나머지는 문득 변경의 관(關)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성화(成化) 4년(1468년) 북로(北虜) 모리해(毛里孩, 북원(北元) 전기 때 몽고의 봉건 제후로 고북구(古北口) 바깥에 옹우특부(翁牛特部)의 수령)와 내통하여 천성(天城)을 침입하니 도독(都督) 이탁(李鐸)을 보내 그들을 꾸짖었다. 12년, 가가사란(癿加思蘭, 몽고 서부에 먀극력부(乜克力部)의 수령)과 요동(遼東)을 약탈하기로 모의하니 변신(邊臣)에게 칙령을 내려 이에 대해 대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역시나 감히 크게 도적질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명 효종의 연호, 1488년 ~ 1505년) 중에 수신(守臣) 양우(楊友), 장경(張瓊)이 황무지를 불사르고 요새(塞)를 나가 엄습하여 사람을 죽이자 변방에 틈이 드디어 생기게 되었다.
⇒ 태감(太監) : 대감(監). 당나라 때 설치한 관직이다. 내시성(内侍省)을 마련하면서 그 장관에 감(監)과 소감(少監)이라 하였다. 이후에 태감은 환관(宦官)의 통칭이 되기도 한다. 요(遼)나라 때에는 국가의 재용인 쌀, 돈의 출입과 궁중에서 소용되는 각종 재물을 관장하는 기구인 태부사(太府寺)를 고쳐 태부감(太府監)으로 만들고 그 장관을 태감(太監)이라 불렀다. 명나라 때는 환관(宦官)이 거느리던 아문(衙門, 관서) 각각에 장인태감(掌印太監, 아문(衙門)의 관방 인새(官方印璽)를 관리)을 따로 설치하였고 궁정 안에 내시(内侍)가 황제와 그 가족을 모시었다. 명나라 중엽 이후에는 그 권력이 확대되어 사신이나 감군(監軍), 진수(鎮守)를 보내는 힘도 가지게 되었다. 다만 명나라에서는 태감이 굳이 환관만이 앉히는 자리라는 규정은 없었다고 한다.
정덕(正德, 명 무종의 연호, 1506년 ~ 1521년) 초에 부락이 이미 울타리 격인 신하의 나라가 되었는데 겉으로는 유순했지만, 몰래 거역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입하여서 도둑질하였다. 타안(朵顏) 수령(督) 화당(花當)이 공물을 더 첨가하기를 요구하여 그 아들 파아손(把兒孫)이 내지로 깊이 들어와 노략질하였고 걸핏하면 이북(迤北)과 친분을 맺었다고 들먹여 중국을 두렵게 하였다. 혁란태(革蘭台)라는 사람은 화당(花當)의 손자이다. 올량합(兀良哈)에서 타안(朵顏)이 큰 부(部)이고 타안(朵顏)에서는 화당(花當)이 귀한 씨(貴種)이다. 화당(花當)의 큰아들 혁렬패라(革列孛羅)가 일찍 죽고 그 아우 파아손(把兒孫)이 날래고 용감하였다. 10년에 파아손(把兒孫)이 마란곡새(馬蘭峪塞)로 들어와 참장(參將) 진건(陳乾)을 살해하니 도독(都督) 계용(桂勇)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파아손(把兒孫, 또는 파이사(巴爾斯))이 차독(扯禿, 또는 차탁(扯托), 찰극도(察克圖)) 등을 보내어 말을 하기를 「청컨대 명나라 조정에 공물을 들이고 나아가 말을 바쳐서 건(乾)을 죽인 죄를 속죄받고 싶다. 」 하였다. 또 속여 말하기를 “야림패라간아로아로홀(射林孛羅幹兒路阿剌忽)이 조만간 여러 부(部)를 규합하여 대거 들어와 노략질할 것이라 소실태(小失台)와 호차독(呼扯禿) 들을 떠나게 하였고 나 역시 다행히 무사합니다.」 하고는 적이 물러났다고 아뢰니 명나라는 군대를 되돌렸다. 그러나 얼마 뒤 들어와 노략질하였고 참장(參將) 위상(魏祥)의 전 군대가 몰살을 당하였다. 당시 파아손교열(把兒孫狡劣)이 여러 번 약탈을 모의하여 여러 부(部)가 서로 그에게 붙었었는데 얼마있다가 역시 죽었다. 화당(花當)의 붙이 사람이 모두 혁란태(革蘭台)에게 붙었고 혁란태(革蘭台)의 말 공물을 늦추게 하니 아직 번관(番官, 속국의 관리를 뜻하는 蕃官을 말하는 듯)을 잇기를 청하지 못한 것이다. 번신(邊臣)이 말씀을 올려 병부령(兵部令)을 부락(部落)에 통역한 뒤에 공물 들이는 것을 허락하게 하였다. 혁란태(革蘭台)가 마침내 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어양(漁陽) 여러 작은 관(關)과 보(堡)가 모두 잔인하게 깨졌다.
⇒ 야선(也先, Esen, 1407년—1454년 8월) : 청나라에서는 액삼(額森)으로 기록하고 있다. 작라사씨(綽羅斯氏, 준갈이부(準噶爾部)의 왕족)이다. 15세기(명조(明朝) 중엽 때), 몽고칸국(蒙古汗國) 와랄부(瓦剌部, 몽고고원 서부 부족)의 수령이다. 명조(明朝)에 조공(朝貢)하여 경순왕(敬順王)에 봉해졌고 그의 아버지 탈환(脫懽)이 세상을 뜬 뒤에 직위를 이어 「태사 회왕(太師淮王)」이라 일컬었다. 그는 대칸(大汗) 탈탈불화(脫脫不花)를 깨부수고 탈탈불화(脫脫不花)의 아우 아갈파이제(阿噶巴爾濟)를 옹립하여 대칸(大汗)의 자리에 앉혔는데 오래지 않아서 아갈파이제(阿噶巴爾濟)를 살해하고 진격하여 원래 황금가족(黃金家族)에 속하였던 「가칸(可汗)」이라는 호칭을 빼앗아 가지고서 스스로 29대 몽고대칸(蒙古大汗) 자리에 대신 섰다. 〈황금가족(黃金家族) : 징키스칸의 가족이다. 곧 걸안부패아지근씨(乞顏部孛兒只斤氏)이니 몽고어로는 “아륵단·올로흑(阿勒壇·兀魯黑)”(Altan Urugh)이라 일컫는다. “아륵탄(阿勒壇)”은 “금(金)”이라는 뜻이고 “올로흑(兀魯黑)”은 “자손”, “후예”를 뜻한다.〉 야선(也先)의 통치 기간은 1453년 9월 12일에서 1454년이다. 그의 통치 동안 와랄부(瓦剌部)가 가장 성대한 시기에 이르러서 몽고본부(蒙古本部)도 와랄(瓦剌)에 신하로서 소속되었고 아울러 그는 일찍이 「4십 4만 몽고」를 통솔하여 명나라로 진군하여 공격하여서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을 빚었다.
가정(嘉靖) 11년(1532년) 9월, 순무(巡撫) 왕대용(王大用)이 타안(朵顏)과 내통하여 두터이 뇌물을 주고 그 무령산(霧靈山)에 성을 쌓으려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추아퇴(酋阿堆), 합리적(哈利赤)이 건창(建昌), 희봉(喜峰), 태평(太平)의 여러 울타리를 자주 들어가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며 혁란태(革蘭台)가 다시 관직을 높여주기를 간청하였다. 병부(兵部)에서 대용(大用)이 일 벌리기를 좋아하니 모백온(毛伯溫)을 대신 기용하기를 청한다고 말하였다. 대용(大用)이 어양순무(漁陽巡撫)에서 해고되었다. 백온(伯溫)이 진(鎮)에 이르렀고 로(虜)가 더욱 변방을 도적질하니 변방 사람들이 농사나 가축을 풀어놓고 칠 수가 없었다. 20년, 혁란태(革蘭台)가 북로(北虜)를 끼고서 공물을 더 들이고 공위(貢衛, 공물을 지키며 운반하는 사람을 말하는 듯) 3백 사람을 요구하지만, 명나라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위(衛) 2백 사람을 청하였지만,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때때로 새(塞) 아래에 출몰하더니 번번이 「소왕자(小王子)와 연합하여 조만간 대거 새(塞)에 들어오겠다.」 하였다. 때마침 엄답길낭(俺答吉囊)이 대동(大同)으로부터 태원(太原) 깊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시기를 놓친 이전에 바쳐야 할 공물을 보충하고 2백 사람을 호위시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21년, 황제의 독단으로 조서(內批)를 내려 호수중(胡守中) 시랑(侍郎) 겸 헌직(憲職, 탄핵과 규찰 담당)을 시켜 군무(軍務)의 진압과 토벌(撫勦)을 감찰하게 하였다. 수중(守中)은 간사하고 엉큼하며 이익에 환장하여 내탕금(內帑金) 대부분을 말아먹고 또 제멋대로 변방 새(塞)로 나가 요(遼)와 금(金)나라 이래로 자라온 소나무 백만 그루를 죄다 베어 울타리 노릇을 했던 나무를 스스로 헐어 없앴고 부자나 옛 장수(舊將)들에게 금전을 두루 갈취하였다. 언관(言官)이 수중(守中)을 탄핵하여 죽이기를 논의하였다. 서시 순무(西市巡撫) 서숭(徐嵩)이 일을 맡고 수중(守中)을 관적(官籍)에서 파냈다. 얼마 뒤, 숭(嵩)이 곳간의 돈과 재물을 털어먹은 것이 드러나 체포되어 먼 지방에 유배 살이 하면서 수(戍) 자리를 살게 하였다.
22년, 배반자 백통사(白通事, 통사는 역관)가 로(虜)에 길잡이를 하여 자주 우리 변방 새(塞)를 침범하니 순무(巡撫) 허론(許論)이 병사를 매복시켜 백통사(白通事)를 참수하였고 논(論)이 부도어사(副都御史, 감찰, 탄핵 및 건의를 담당한 도찰원(都察院)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를 돕는 관직)로 관직이 올랐는데 관직을 떠나기를 청하였다. 주방(朱方)이 논(論)의 자리를 대신하였는데 방추병(防秋兵, 가을철에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노략질할 것을 대비하여 병사들을 더 강화하는 것) 철수를 청한 것이 너무 일러서 로(虜)에게 노략질을 당하였다. 이 때문에 체포되어 경사(京師, 북경)에 이르러 궐 아래에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직방낭중(職方郎中, 지도와 해자, 둔영, 봉화 등과 명나라로 와서 붙은 변방의 여러 민족에 관련된 일을 담당) 한욱(韓勗) 역시 곤장을 맞고 죽었다.
25년, 로(虜)가 새(塞)로 크게 들어왔다. 다음 해, 북로(北虜)가 올량합(兀良哈)에 길잡이를 하여 요동(遼東)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 북로(北虜)에 대한 자료 :
①청나라 초기에 지은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에는 북로 대신에 해서제부(海西諸部)로 나와 았다. “26년 겨울 10월, 타안(朶顏)이 더욱 해서(海西) 여러 부(部)와 결탁하여 요동(遼東), 서쪽 변방 요새(西塞)에 출몰하였다. 얼마 있다가 혁란태(革蘭台)가 죽자 그 아들 영극(影克)이 그 자리를 세습하였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따르면 삼위(三衛)는 공물을 올릴 때, 가서 몸소 벼슬(職)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혁란태(革蘭台) 부자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람을 보내어 대신 벼슬(職)을 청하기 시작하였다. 영극(影克)이 그 아버지보다도 날래고 사나워 엄답(俺答)이 새(塞)로 크게 쳐들어오기를 더욱 꼬셨다.” 明史紀事本末/卷20 二十六年冬十月,朶顏益結海西諸部,出沒遼東、西塞。無何,革蘭台死,子影克襲。故事,三衛以貢時身受職,至革蘭台父子始遣人代請。而影克剽悍踰于父,益誘俺答大入塞。〉
② 명나라 말기 섭향고(葉向高)는 창하초(蒼霞草)에서 “북로(北虜)는 동쪽으로 올량합(兀良哈)에 이르고 서쪽으로 와랄(瓦剌, 서부 몽고)에 이르니 모두 그 땅이다.” 하였다. 《蒼霞草 北虜考》:北虜東至兀良哈,西至瓦剌,皆其地。
오학편(吾學編) 지리술(地理述)에서 말하기를
「국초(國初)에는 옛 회주(古會州), 대녕(大寧) 땅에다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를 설치하여 여러 둔위(屯衛)에 군영을 일으키고 영번(寧藩, 곧 영왕(寧王)을 말한다. 명나라 때는 처음으로 주원장의 아들 주권(朱權)이 봉해졌다)을 봉하여 세워 요동(遼東), 선부(宣府)와 더불어 동서(東西)를 연결하여 이어서 외변(外邊)으로 만들었다. 조금 있다가 위국공(魏國公)에게 고북구(古北口)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를 경영하여 다스리게 하니 관애(關隘, 관문이나 요새)를 늘려 쌓아서 내변(內邊)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계주(薊州) 서쪽은 거용(居庸)과 닿아있고 북쪽은 꺾여서 동쪽으로 가고 남쪽은 바닷가에 이르러 어양(漁陽), 노룡(盧龍)을 다 품어 모두 그 관리 안에 들어갔다. 큰 배를 띄워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가 뭍에서는 조(趙) 땅과 위(魏) 땅을 달리며 어깨와 팔꿈치인 듯한 해달(奚達)과 옷깃과 띠인 듯한 원택(原澤)에, 경사(京師)에 기대고 도우니 웅진(雄鎮)이라 일컫는다. 게다가 땅이 매우 도타워 식물, 가축, 물고기, 소금, 곡식(黍稷)의 이로움이 기내(圻內, 수도권이라는 뜻)에서 으뜸이다.
문황(文皇, 명나라 3대 임금 성조(成祖), 영락제. 재위 기간 1402년 7월 17일 ~ 1424년 8월 12일)이 난(難)(훗날의 영락제가 1398년 일으킨 황실 내 권력 싸움인 정난지역(靖難之役)을 말함)을 안정시키고 올량합(兀良哈)이 우리 쪽으로 붙자 이에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를 보정(保定)으로 옮겨 대녕도사(大寧都司)로 하고 영주(營州)에다 일으킨 여러 위(衛)를 경부(京府, 지금 북경 지구) 지역에다 흩어 놓았다. 대녕(大寧) 땅을 싹 올량합(兀良哈)에 주고서 공물을 들이고 변경에 장마당을 열어주어 우리의 울타리(藩籬, 신하의 나라)로 만들었으니 타안(朵顏), 대녕(大寧), 복여(福餘) 삼위(三衛)가 이것이다. 이로부터 홍라(紅螺), 백운(白雲)의 북쪽은 융적(戎寇)에게 버려두니 요동(遼東), 선부(宣府)의 지지가 막히고 끊겨 여러 이(夷)가 우리의 험준한 길을 찢었고 우리의 문 앞 뜰(門庭)을 엿보며 우리의 관직과 상(賞)을 요구하여 우리의 관리와 백성에 잔혹하게 굴었다. 희봉(喜峰), 삼둔(三屯), 밀운(密雲), 백양(白羊)은 그저 쪼그라들기만 하였다. 이를 비유하자면 왼쪽 팔에 종기가 난 격이니 그렇다면 상곡(上谷)은 고아나 다름이 없었고 등 뒤는 곱사등이가 된 격이니 그렇다면 노룡(盧龍)은 추운 날에 짧은 홑옷을 걸친(單薄) 꼴이었으며 그 목구멍(요해처)을 막으면 요해(遼海, 요하 유역 동쪽에서 바다로 이르는 지구)는 한 다리 건너에 자리하고 있고 그 가슴과 배를 누르면 황실의 능침(陵寢)이 아슬하게 핍박받고 있는 격이니 계책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정통(正統, 명 영종의 연호, 1436년~1449년) 이전에 이(夷)가 마음으로 두려워 복종하여 사방 구석이 편안하고 조용하였는데 토목의 변(土木之變, 정통(正統) 14년, 1449년 9월 1일 발발. 명 영조(英宗)가 북벌 전쟁을 벌일 때, 지금에 장가구 일대에 있는 토목보(土木堡)에서 와랄(瓦剌)에게 패배한 일)에서 삼위(三衛)가 야선(也先)을 위해 길잡이를 하였으니, 비로소 도어사(都御史) 추래학(鄒來學)에게 명하여 삼위를 경영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얼마 뒤, 총병(總兵)과 참장(參將), 내신(內臣)을 증설함이 날로 많아졌고 삼위(三衛) 역시 속임수 쓰기를 반복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여전히 감히 드러내 놓고 감히 외적(寇)이라고 말하지는 못한 것이다.
홍치(弘治, 명 효종의 연호, 1488년~1505년) 중에 수신(守臣) 양우(楊友), 장담(張瓊)이 황무지를 태우고 갑자기 습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니 변방에 소요의 틈이 드디어 일어났다. 정덕(正德, 명 무종의 연호, 1506년~1521년) 이래로 부락들이 이미 번성하였는데 타안(朵顏)이 유독 번창하여 겉으로는 명나라에 순응하였지만, 속으로는 거역의 마음을 품다 보니 누차 제멋대로 침입하여 빼앗았다. 화당(花當)이 명나라 조정을 을러대 공물을 더 들이기를 요구하며 파아손(把兒孫)은 깊이 들어와 사람들을 사로잡고 노략질을 하였고 걸핏하면 이북(迤北)과 친분(혼인을 맺었다는 말인 듯)을 맺은 것을 떠벌려 명나라 안에서는 속을 썩고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참장(參將) 진건(陳乾), 위상(魏祥)은 삼위와의 싸움에서 앞뒤로 이어서 거꾸러져 죽어 이 때문에 삼위(三衛)가 날로 교만해졌다.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1522년~1566년) 중에 혁란태(革蘭台)가 문득문득 관직과 상(賞)을 요구하며 공물을 더 들이기를 청하였다. 화(禍)의 기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을 기다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천수산(天壽山)에 칠릉(七陵)이 있다. 내가 일찍이 사관(祠官)을 쫓아서 장릉(長陵)에 이르렀었는데 북쪽으로 북쪽으로 봉첩(烽堞)이 바라보이는 것이 두어 리(里)가 되지 않았다.
기사(己已)의 변(變)(후금, 곧 청나라가 명나라 경기(京畿)를 공격한 전투로 1629년 10월에서 1630년 1월까지 전투가 벌어졌다)에 사관(祠官)이 不能至창평(昌平)에 이르지 못하였다. 창평능(昌平陵)에 위(衛)의 관병(吏卒)이 가서 지내고 군사들을 늘리고 둑(담)을 수선해야 함이 이래서 급하게 되었다. 고북구(古北口), 조하천(潮河川)이 모두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고 우리가 막기에는 유리한 요해(要害)의 땅으로 하천(河川)은 본디 옛날 원(元)나라가 더위를 피하던 옛 구역(故道)인 데다가 더욱이 로(虜)의 길목(衝)이 된다. 다리를 짓자니 떠 흐르는 모래(浮沙) 때문에 사람이 서 있기가 어렵고 참호(塹)를 만들자니 물이 넘쳐나 진흙탕으로 바뀐다. 도사(都史) 홍종(洪鍾)이 일찍이 관(關)과 성(城)을 설치하여 두었지만, 그 위치가 고립되어 지키기가 어려웠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하천의 물줄기를 막고 돌 돈대(石墩) 십수 개를 세워 막아둔 물이 섞이며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가 아래로는 흐르는 물로 흘러가고 위로는 봉화(烽火)가 전해지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 역시 한 방책이었다. 희봉구(喜峰口)라는 삼위(三衛)가 공물을 들이는 길은 조금 깊고 험준하고 연하(燕河), 태평채(太平寨), 마란욕(馬蘭峪), 밀운(密雲) 이 네 영(四營)은 소리나 몸짓(聲勢)으로도 서로를 도울 수 있어 로(虜)가 이르게 되면 두 영(兩營) 가운데가 그 길목에 해당된다. 연하(燕河), 밀운(密雲)이 서로 군사들을 나누어 적을 협공할 수 있는 기각(掎角, 사슴을 잡을 때 앞에 사람은 뿔을 잡고 뒤에 사람은 다리를 잡는 형국)의 형세가 된다. 준화(遵化), 삼둔(三屯), 건창(建昌)은 참으로 그 안을 방비를 단단히 하여 로(虜)가 큰 좌절을 마주하였다. 영평(永平), 양성(梁城) 사이에는 로(虜)의 침입에 대한 근심이 없었고 역시 해적(海寇)도 없었다. 만약 산록에 숲과 풀들이 나무로 둘러쳐진 단단한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나무나 풀들을 땔감, 목탄(木炭)에 이바지하게 된다면, 가지나 줄기를 베게 됨에 따라 날로 산록은 비어 민둥산이 되게 된다. 가정(嘉靖) 중에 호수중(胡守中)이 또한 변방(塞)으로 나가 요(遼), 금(金) 이래로 살고 있던 소나무 숲 백만 그루를 깡그리 베어내 스스로 울타리의 보호(藩蔽)를 거두는 짓을 하였었다.」 하였다.
*기사(己已)의 변(變) 1
*기사(己已)의 변(變) 2 (두 지도 모두 바이두에서 내려받았음)
山戎部彙考二
《遼史地理志》。
《遼燕京至中京道里考》
宋王曾《上契丹事》曰:「出燕京北門,至望京館,五十里 至順州,七十里至檀州,漸入山,五十里至金溝館。將 至館,川原平曠,謂之金溝淀。自此入山,詰曲登陟,無 復里堠,但以馬行記日。約其里數,九十里至古北口, 兩傍峻崖,僅容車軌。又度德勝嶺,盤道數層,俗名思 鄉嶺,八十里至新館,過雕窠嶺、偏槍嶺,四十里至如 來館,過烏濼河,東有灤州。」又過黑斗嶺、「度雲嶺、芹菜 嶺,七十里至柳河館」、「松亭嶺」甚險峻,七十里打造部 落。「東南行五十里,至牛山館,八十里至鹿兒峽館,過 蝦蟆嶺,九十里至鐵漿館,過石子嶺。」自此漸出山,七 十里至富谷館,八十里至通天館,二十里至中京大 定府。城垣卑小方圓,纔四里許,門但重屋,無築闍之 制。南門曰「朱夏門」,內通步廊,多坊門。又有市樓四,曰 天方、大衢、通闤、望闕。次至大同館。其門正北曰「陽德 閶闔。」城西內西南隅岡上有寺,城南有園圃,宴射之 所自過。北口居人草庵板屋,耕種但無桑柘,所種皆 從壟上,虞吹沙所壅。山中長松鬱然,深谷中時見畜 牧牛馬橐駝,多青鹽黃豕。
《元史地理志》
《大寧路所屬州縣考》
大寧路:〈上〉本奚部。唐初,其地屬營州。貞觀中,奚酋可 度內附,乃置驍樂郡。遼為中京大定府。金因之。元初 為北京路總管府,領興中府及義、瑞、興、高、錦、利、惠、川、 建、和十州。中統三年,割興州及松山縣屬上都路。至 元五年,併和州入利州為永和鄉。七年,興中府降為 州,仍隸北京,改北京為「大寧。」二十五年,改為武平路, 後復為大寧。領司一,縣七,州九。 錄事司。初置警 巡院。至元二年,改置錄事司。
縣七
大定。下。中統二年,省長興入焉。
龍山。下。初屬大定府。至元四年,屬利州。後復來屬。
富庶。下。至元三年,省入興中州。後復置。
和眾,下 。金源,下 。惠和,下 。武平。下。
州九
義州下
興中州。下。元初,因舊為興中府,後省。至元七年,又降府為州。
瑞州。下。至元二十三年,伯顏奏准「以唆都哈䚟等拘收戶計種田,立屯於瑞州之西,撥頻海荒間地及時開耕,設打捕屯田總管府,仍以唆都哈䚟等為屯田官。」
高州,下 。錦州,下 。利州,下 。惠州,下 。川州,下。建州。下。
《明實錄》
《三衛建置沿革考》
洪武二十年秋九月,置北平行都指揮使司於大寧。 二十二年春正月壬午,會寧侯張溫及周興奏「修拓 大寧等城成」,井上其規制:「大寧城門五,城周三千六 十丈,濠長三千一百六十丈,深一丈九尺;會州城門 四,城周一千一百二十八丈,濠長一千一百八十九 丈二尺,深一丈八尺;富峪城門四,城周九百丈,濠長 九百八丈二尺,深一丈三尺,寬河城門四。城周八百 一十二丈,濠長八百五十九丈,深一丈五尺。」夏五月 辛卯,置泰寧、福餘、朵顏三衛于兀良哈,地在烏龍江 南、盧龍塞北,以處降部。「東自全寧抵喜峰外,近宣府, 曰朵顏;自錦、義歷廣寧至遼山,曰泰寧;自黃泥窪踰 瀋陽鐵嶺,曰福餘」,在潢水北、大寧外邊,由冷口入貢。 置驛于遷安縣,接達京師。二十七年六月乙酉,命兵 部官至北平布政司議置驛傳。自大寧至廣寧東路 四百八十五里,置十驛;中路北平至開平七百六十 五里,置十四驛;西路至開平六百三十里,置十三驛; 北路土木至宣府一百里,置二驛。三十年春正月,置 馬驛八:「東曰涼亭、沈」阿、賽峰、黃崖,四驛接大寧,古北 口。西曰桓州、威胡、明安、隰寧,四驛接獨石。
建文元年秋七月庚寅,「大寧總兵劉貞、都督陳亨、都 指揮卜萬,引《大寧》兵號十萬」,出松亭關,駐沙河,進攻 遵化,貞等退保松亭關。冬十月,燕王襲破大寧,以寧 王及大寧官軍歸北平永樂元年春三月,改北平行都指揮使司為「大寧都 指揮使司」,隸後府,徙于直隸保定府。遷各衛于內地 營州左右于薊州,中于平谷「縣,前于香河縣,後于三 河縣。興州:前于豐潤縣,後于三河縣,中于良鄉縣,左 于玉田縣,右于遷安縣。」大寧中,前及會州于京師,左 右于萬全都司。因兀良哈三衛來朝,益求內附,以大 寧故衛地使為外藩,「自古北口至山海關為朵顏,自 遼東廣寧前屯衛至廣寧白雲山為泰寧,自白雲山 至開原為福餘歲許百人。干聖節及正旦兩貢駝馬, 並由喜峰口置把總提督之,即松亭關」也,達于三屯。 灤陽驛出遷安東北境,朝京師。而遷安驛徙于山海 關,以隆平侯張信為總兵,備禦桃林口。是年,東勝左 衛自山西行都司調至,領五千戶所,其右徙遵化。開 平。中屯衛原設大寧、沙嶺,「洪武中調真定府,移置灤 州義豐里石城廢縣。領五千戶所。」
鄭曉吾學編
《兀良哈考》
兀良哈,在烏龍江南,漁陽塞北,春秋時山戎地。元為 大寧路。戶四萬六千,口四十四萬八千。國初,割錦、義、 建、利諸州隸遼東,設都司于惠州,領營、興等二十餘 衛所,所謂「北平行都司」也。
洪武十四年,封子權於大寧,為寧王。二十二年分兀 良哈為三衛於潢水之北,曰朵顏,曰福餘,曰大寧。處 降部以脫魯忽察兒、海撒、男奚阿札失里為三衛指 揮使,同知並邊,為我藩籬。靖難初,首劫大寧兵,及召 兀良哈諸酋,率部落從行,有功,遂以大寧畀三衛。寧 王,移封南昌。徙行都司於保定,為大寧都司。令三衛 歲二貢衛百人。東起廣寧前屯,歷喜峰近宣府,為朵 顏;自黃泥窪逾瀋陽鐵嶺至開原,為福餘;由錦義度 遼河至白雲山,為大寧。皆逐水草,無恆居。三衛,朵顏 最強,分地又最險。永樂中最親附。宣德時,嘗入漁陽 塞上,率諸將出喜峰關,敗諸鹵于寬河,誅其大酋,自 後稍馴順。
正統中又叛,侵盜東北關諸寨,索鹽米賞賜而已。以 故喜峰、密雲間有都指揮或都督鎮守,驗貢夷。己巳, 福餘、大寧結也先為也先鄉道朵顏獨扼險不肯從。 也先至,不能入塞,不得利,大掠福餘、大寧人畜去。始 敕都御史鄒來學經略。已而設太監、參將,又設總兵。 景泰四年,守臣言「兀良哈貢使往來不絕,為瓦剌間」 諜。詔自後使至,許二三人入京,餘不得輒入關。成化 四年與北虜毛里孩通,侵天城,遣都督李鐸詰之。十 二年,通癿加思蘭謀寇遼東,敕邊臣備之,然亦未敢 大為寇盜。弘治中,守臣楊友、張瓊燒荒出塞掩殺,邊 釁遂起。
正德初,部落既蕃,陽順陰逆,累肆侵盜。朵顏督花當 求添貢,其子把兒孫深入擄掠,動稱結親迤北,恐中 國。革蘭台者,花當孫也。兀良哈朵顏為大部,朵顏花 當為貴種。花當長子革列孛羅早死,其弟把兒孫驍 勇。十年,把兒孫入馬蘭峪塞,殺參將陳乾,遣都督桂 勇討之。把兒孫遣扯禿等來言,請入貢,且獻馬贖殺 「乾罪,又謾言射林孛羅幹兒路阿剌忽旦夕且糾諸 部大舉入寇,令小失台、呼扯禿等去,我亦幸無事。」奏 敵退,班師。未幾,入寇,參將魏祥全軍覆沒。時把兒孫 狡劣,屢謀劫奪,諸部不相附,尋亦死。花當種人皆附 革蘭台,革蘭台貢馬遲之,未請嗣番官也。邊臣上言: 兵部令譯部落後許貢。革蘭台遂入寇,漁陽,諸小關 堡皆殘破。
嘉靖十一年九月,巡撫王大用欲通朵顏,與厚賂,城 其霧靈山,不果。是時,酋阿堆、哈利赤數入建昌喜峰、 太平諸寨,殺掠人畜,革蘭台又乞陞官。兵部言大用 喜事,請以毛伯溫代。大用出漁陽巡撫。伯溫至鎮,虜 益盜邊,邊人不得耕牧。二十年,革蘭台挾北虜求添 貢。貢衛三百人,不許;請衛二百人,又不許。時時出沒 塞下,輒云「結小王子,旦夕大舉入塞。」會俺答吉囊自 大同深入太原,不得已,許其補前貢失期者衛二百 人。二十一年,內批胡守中侍郎兼憲職,提督軍務撫 勦。守中憸險嗜利,乾沒內帑金多。又擅出塞,盡伐遼、 金以來松木百萬,自撤藩籬,遍索富人舊將金錢。言 官劾守中,論死。西市巡撫徐嵩阿事,守中削籍。已而 有發嵩乾沒庫金者,逮謫戍。二十二年,叛人白通事 道,虜數侵我塞,巡撫許論伏兵斬白通事,論進官副 都御史,請告去。朱方代論,以請撤防秋兵太早,為虜 所掠。逮至京,杖死闕下。職方郎中韓勗亦杖死。二十 五年,虜大入塞。明年,北虜道兀良哈入寇遼東。吾學 編《地理述》曰:「國初即古會州、大寧地,設北平行都司, 興營諸屯衛,封建寧藩,與遼東、宣府聯絡東西,為外 邊。已而魏國公經略自古北口至山海關,增修關隘, 為內邊。」以故薊州西接居庸,北折而東,南抵海上,盡 漁陽、盧龍,皆其管內。𦪑泛登、萊,陸走趙、魏,肩肘奚、達, 襟帶原澤,馮翊京師,號稱雄鎮。又地壤深厚,樹畜魚 鹽,黍稷之利,甲於圻內。文皇靖難,兀良哈內附,迺徙北平行都司於保定,為大寧都司,而散布興營諸衛 于京府之境。大寧地盡畀兀良哈,通貢互市,為我藩 籬,朵顏、大寧、福餘三衛是也。自是紅螺、白雲之北,棄 與戎寇,遼東、宣府聲援「隔絕諸夷,裂我險阻,闖我門 庭,要我官賞,殘我吏民。喜峰、三屯、密雲、白羊,僅僅收 縮。譬之左臂癰腫,則上谷孤子,後背傴僂,則盧龍單 薄;哽其喉吭,則遼海坐隔,扼其胸腹,則陵寢警逼,失 計甚矣。」正統以前,夷心畏服,方隅寧謐,土木之變,三 衛為也。先鄉道,始命都御史鄒來學經略,已而總兵 參將內「臣增設日多,三衛亦矯詐反覆,然尚未敢顯 言為寇也。」弘治中,守臣楊友、張瓊燒荒,掩殺無辜,邊 釁遂起。正德以來,部落既蕃,朵顏獨盛,陽順陰逆,累 肆侵噬。花當脅求添貢把兒孫,深入擄掠,動稱結親 迤北,恫疑中國,而參將陳乾、魏祥先後陷沒,以故三 衛日驕。嘉靖中,革蘭台,輒要官賞,請益貢。禍機所伏, 不待智者而知也。天壽山,七陵在焉。余嘗從祠官至 長陵,北望烽堞不數里。己已之變,祠官不能至昌平。 昌平陵衛吏卒如僑寓,增兵繕障,於斯為急。古北口、 潮河川俱要害,而河川本故元避暑故道,尤為虜衝。 作橋則浮沙難立,為塹則漲水易淤。都史洪鍾雖嘗 設有關城,勢孤難守。議者欲「塞川流,建石墩數十,令 其錯綜宛轉,下通流水,上傳烽火,亦一策也。喜峰口 三衛貢道稍深峻,燕河、太平寨、馬蘭峪、密雲四營,聲 勢相援,虜即至。中兩營當其衝。燕河、密雲相掎角。遵 化三屯、建昌固其內防,虜當大挫。永平、梁城間無虜 患,亦無海寇。若乃山麓林莽,樊樹阻固,以供薪炭,伐 條枚日就疏」薄。嘉靖中,胡守中又出塞,盡斬遼、金以 來松林百萬,自撤藩蔽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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