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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15

by 쥐눈이 2024. 10. 31.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마지막

()나라 때는 포특합(布特哈)이라 하였다.

()은 만주(滿洲)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에 줄이 닿아 있다. 애신(愛新)이란 번역하면 황금(원문에는 막금(漠金)으로 되어 있는데 애신은 곧 황금(黃金)으로 알려졌다)’이다. 만주(滿洲)의 관동(關東, 산해관 동쪽인 요녕, 길림, 흑룡강 이 세 성을 말하는 듯)에 살면서 스스로 주신(朱申)이라 일컬었으니 곧 여진(女真)이라는 말이 굴러 바뀐 소리(轉音)이다. 생여진(生女真) 아골타(阿骨打)가 요()나라를 멸하고 금()나라를 건국하였고 청()은 그 후예임에는 의심에 여지가 없다. 하 은 주 삼대(三代) 때의 숙신(肅慎)은 바로 여진(女真)의 선조이다. 숙신(肅慎)이라는 소리가 굴러 바뀌어 여진(女真)이 되었으니 오히려 여진(女真)이라는 소리가 굴러 바뀌어 주신(朱申)이 된 것과 같은 예이다. 포특합(布特哈)에 경우에 이르러서, 한자로 번역하면 타생(打牲, 사냥하다)”는 것이니 대개 토착민들이 사냥하며 생활하는 데에 따라서 이름을 얻은 듯하다.

타생(打牲) : 타생은 청대(清代)에 눈강(嫩江) 유역과 대(), 소흥안령(小興安嶺) 일대에 악온극(鄂溫克), 달알이(達斡爾), 악륜춘(鄂倫春), 석백(錫伯), 혁철(赫哲) 등 여러 물고기 잡고 사냥하던 겨레에 대한 총칭이다. 만어(滿語) “포특합(布特哈, 포특합은 사냥하다(虞獵)’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강희(康熙, 청 강희제, 3대 황제, 재위 기간 1661- 1722) 중에 그 지역에 포특합총관(布特哈總管)을 설치하여 이곳을 다스리며 관리하였다. 길림(吉林)타생오랍총관(打牲烏拉總管)”이 있다. (바이두)

 

 

강희(康熙) 28, 총관아문(總管衙門)을 설치하고 눈강(嫩江) 오른쪽 기슭 의와기(宜臥奇) 지방에 머물며 방어하고 해당 지역에 팔기(八旗)의 일 처리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팔기(八旗)는 상황(廂黃), 정황(正黃), 정백(正白), 정홍(正紅), 상백(廂白), 상홍(廂紅), 정감(正藍), 상감(廂藍)들의 여덟 가지 깃발 색을 단 군대이다. ()나라 제도에 국군(國軍)은 오롯이 기호(旗戶)를 말미암아 기()를 나누어서 엮어 훈련을 하여서 무력을 쓸 일에 대비하였다. 포특합(布特哈) 지방은 달호이(達呼爾), 색륜(索倫) 등의 부락 사람들이 섞여 사는 까닭에 마련된 92()를 팔기(八旗)로 나누어 엮고 통일적으로 총관아문(總管衙門) 하나를 설치하여 색륜(索倫), 달호이(達呼爾), 만주(滿洲) 세 총관(總管)을 두고 함께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아서(衙署)는 서북에 세웠으니 금(), ()나라 때의 변방 보루(邊堡)를 따라 동남으로 눈강(嫩江) 유역을 바라보며 니이길 나루 어귀(尼爾吉渡口 흑룡강의 지류인 송화강의 지류 호란하(呼蘭河)에서 서남쪽에 있다. 또한 달알이족(達斡爾族)의 성씨이기도 하다)에 미쳐 산이 두르고 물은 안은 의와기 후둔(宜臥奇後屯)이니 그 관할 영역은 서남으로 색악이길산(索岳爾吉山)에서 시작하여 서북으로 호륜패이(呼倫貝爾)를 거쳐서 내흥안령(內興安嶺)을 경계로 삼고, 동북으로는 묵이근(墨爾根), 곧 지금에 눈강현(嫩江縣)과 땅이 연결되며 동남으로는 눌모이하(訥謨爾河, 지금에 북안시(北安市) 소흥안령 서쪽에 있다)의 원류가 호란(呼蘭)과 제제합이(齊齊哈爾)를 거치는, 바로 지금의 용강현(龍江縣)과 함께 경계를 이룬다.

동치(同治, 청 제10대 황제 목종(穆宗)의 연호, 18621301875112) 말년 이후에 역임한 만주 총관(滿洲總管)은 낙문덕륵화이(諾們德勒和爾), 巴彥蒙庫良忠富爾增布(앞에 이름들을 찾아내지 못하여 누구이며 몇 명의 이름인지 몰라 원 글자를 그대로 실는다)이라고, 모두 제제합이 기(齊齊哈爾旗) 사람이다. 달호이(達呼爾) 총관(總管)은 살니포(薩尼布)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타본심둔(他本沁屯) 사람이며 호격정액(胡格精額)이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곽기둔(霍奇屯) 사람이며 업보춘(業普春)이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덕도랍둔(德都拉屯) 사람이다. 색륜 총관(索倫總管)은 부륵흥아(富勒興阿)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개활심둔(開闊沁屯) 사람이며 문성(文成)이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탁목심둔(托木沁屯) 사람이며 은특항액(恩特恒額)이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알포객둔(嘎布喀屯) 사람이며 능풍아(凌豐阿)라고, 서포특합(西布特哈) 아이랍둔(阿爾拉屯) 사람이다.

그 동치(同治) 말년 이전에 관명(官名), 경자 아란(庚子俄亂, 1900717-21일에 제정 러시아 군대가 경내에 침범하여 살상과 파괴를 벌인 일) 때 포합아문(布哈衙門) 공문서(檔案)가 박이다 부도통아문(博爾多副都統衙門)에 있었던 탓에 동시에 불에 타버려 거의 없어져 실제를 추적하여 조사할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잠시 비워두기로 한다.

그 아문(衙門) 내부의 조직을 호사(戶司), 병사(兵司), 당사(堂司)로 나누고 매 한 사(一司)에 정당(正堂, 명과 청나라 때 부현(府縣)의 장관을 이름) 한 사람과 부당(副堂) 한 사람, 사관(司官, 각 관서에 속한 낭중(郎中), 주사(主事)등을 말함), 필첩식(筆帖式, 하급 문서 담당 관원) 각 약간 명, 서기(書記) 역시 약간 명을 두어 각 해당 사()의 내부 일처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의와기(宜臥奇) : 유기백과 포서설치국(布西設治局)’ 편에 “1906광서(光緒) 32, 포특합부도통(布特哈副都統)을 없애고 눈강(嫩江)을 경계로 하여서 동로포특합(東路布特哈)과 서로포특합(西路布特哈)을 갈라 설치하고서 각각 총관(總管) 1명을 두어 본로(本路)가 관할하는 각 기()의 일 처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서로포특합(西路布特哈) 총관아문(總管衙門)은 의와기 후둔(宜臥奇後屯, 지금 호륜패이 시(呼倫貝爾市) 속해 있는 막력달와달알이족 자치기(莫力達瓦達斡爾族自治旗)의 니이기진(尼爾基鎮) 북쪽 9 킬로미터에 의와기촌(宜臥奇村)이 있다) 구총관 아문(舊總管衙門)이 있었던 곳에 주둔하였다.” 하였다. 1906光緒32),裁撤布特哈副都統以嫩江為界分設東路布特哈西路布特哈各設總管1分別掌管本路所轄各旗事宜西路布特哈總管衙門駐宜臥奇後屯今莫力達瓦達斡爾族自治旗尼爾基鎮北9公里處宜臥奇村)舊總管衙門處

상황(廂黃) : 양황기(鑲黃旗)를 말한다. 청대(清代) 팔기(八旗) 중에 으뜸기(頭旗)」(滿語ᡶᡝᡵᡝ ᡤᡡᠰᠠfere gūsa. 구사(gūsa)는 깃발()을 뜻한다양홍(鑲紅, 붉은색), 가를 둘러친 황색 깃발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다. 함께 상위의 세 기()가 되는 것은 정황기(正黃旗)와 정백기(正白旗)가 있다.

황양기(鑲黃旗)는 만주(滿洲), 몽고(蒙古), 한군(漢軍) 세 부분으로 나뉘고 따로 기주(旗主)를 두지 않고서 청조(清朝) 황제가 직접 스스로 거느려 통솔하였다. 청조(清朝) 말기에 황양기(鑲黃旗) 아래에 84개 완전 정좌령 편제 (整佐領, 좌령 하나가 150명의 장정을 통솔하면 정좌령이라 한다)2개 반분좌령(半分佐領, 곧 이끄는 장정이 150명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을 관할하니 대략 기정(旗丁, 곧 병정)26천 명이고, 계산 상 그 거느린 가족까지 합치면 총 총 인구는 13만 명이었다. 광서회전사례(光緒會典事例)에 기록되기를 양황기(鑲黃旗) 좌령(佐領)의 정액 비례는, 종실(宗室) 1, 각라(覺羅, 방계 황족) 4, 신만주(新滿洲) 4, 몽고(蒙古) 9, 아라사(俄羅斯) 1, 만주(滿洲)63개에 2개의 반좌령(半佐領)을 보탠 65개이다. 유기문고 중문판에는 滿洲六十五個半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에 맞지않아 원문 滿洲六十三加二個半佐領로 바꾸어 해석하였다.

황제와 후비(后妃), 선조의 비빈(妃嬪)들 그리고 아직 부()를 나누지 않은 황자(皇子)와 출가하지 않은 공주황녀(皇女)도 이 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황양기(鑲黃旗)

 

 

광서(光緒) 20(1894), 삼총관(三總管)을 압축 통합하여 부도통(副都統)으로 고쳐 두어 그 일을 모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아문(衙門)을 옮겨 눈강(嫩江) 동쪽 50리 눌모이하(訥謨爾河) 북쪽 기슭 박이다참(博爾多站) 지방에다 마련하였다.

박이다참(博爾多站)은 바로 지금의 눌하현(訥河縣) 구가기(舊街基) 눌하현(訥河縣)이다. 눌모이하(訥謨爾河, 뜻은 아름다운 가을 물(美麗的秋水))과 관계 때문에 이름을 얻었다. 역임한 부도통(副都統)을 기록해 보자면 업보춘(業普春)이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덕도랍둔(德都拉屯) 사람이다. 총관(總管)으로서 승급하여 충원된 액륵정액(額勒精額)이라고, 동포특합(東布特哈) 백이과둔(伯爾科屯) 사람이며 쌍복(雙福)이라고, 제제합이기(齊齊哈爾旗) 사람이다. 부도통(副都統) 아문내부(衙門內部)의 조직은 그대로 총관아문(總管衙門)처럼 삼사(三司)로 나뉘었고 오직 그 사관(司官)과 필첩식(筆帖式)의 정원만이 그 전과 비교해서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광서(光緒) 32, 부도통(副都統)을 없애고 원래 기()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을 가지고서 눈강(嫩江)을 분계(分界)로써 구획하여 동서 양로(兩路)의 포특합(布特哈)으로 만들고 각각 팔기(八旗)로 조()를 나누어 총관(總管) 한 사람을 두고서 본로기(本路旗)에 딸린 일 처리를 장악하게 하였다.

옛날에 92()를 설치하였다가 이때 이르러 죄다 없앴다. 매 로()의 포특합(布特哈)을 새로이 팔기(八旗)로 조직하였고 기()에 좌령(佐領) 한 사람, 효기교(驍騎校) 한 사람을 두어 각각 본로(本路)의 총관(總管)에 귀속시켜 동서 양로(兩路) 총관서(總管署)를 관할하여 다스리게 하고 내직(內織)은 그대로 두 사(二司)로 나누되 오직 그 사원(司員), 필첩식(筆帖式) 정원만이 그전에 부도통아문(副都統衙門)과 비교해서 감소하였을 뿐이었다.

 

동로포특합(東路布特哈) 총관아문(總管衙門)에는 그대로 부도통아문(副都統衙門)을 설치하였고 옛날 기틀은 민국(民國) 초기에 없애고서 총관(總管)을 고쳐 팔기주판처(八旗籌辦處)로 만들어 총판(總辦) 한 사람, 문독(文牘) 한 사람, 번역(譒譯) 한 사람을 두고서 기()에 딸린 사람들의 생계 일 처리나 지방 행정을 가늠하여 처리하고 방법을 짜서 계획을 정하게 하고 눌하현 공서(訥河縣公署)를 창설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 역임한 총관(總管)은 복령(福齡)이니 제제합이 기(齊齊哈爾旗) 사람이며, 순덕(純德)이라 하니 호란기(呼蘭旗) 사람이다. 주판처 총판(籌辦處總辦)은 덕굉(德宏)이니 동포특합(東布特哈) 개활심둔(開闊沁屯) 사람이며 액륵춘(額勒春)이니 동포특합(東布特哈) 온찰이둔(溫察爾屯) 사람이다.

 

 

서로포특합(西路布特哈) 총관아문(總管衙門)을 옮겨 눈강(嫩江) 서쪽 기슭 의와기후둔(宜臥奇後屯) 구총관 아문처(舊總管衙門處)에 설치하였다. 민국(民國) 10(1921) 포서설치국(布西設治局)을 창설하여 지방 행정의 일 처리를 국()에 귀속시키고 치리국(治理局) 건물 위치를 니이길성(尼爾吉城) 터에 세우고 총관서(總管署) 역시 옮겨 설치성(設治城) 안으로 옮겨 기()에 딸린 사람들의 생계 일 처리를 가름하여 다스리고 방법을 짜내어 계획을 정하게 하였다.

그 역임한 총관(總管)은 상운(常雲)이니 서포특합(西布特哈) 개화둔(凱和屯) 사람이고, 명덕(明德)이니 동포특합(東布特哈) 다금둔(多金屯) 사람이며, /상경 ()() 이니 제제합이 기(齊齊哈爾旗) 사람이고, 직갱액(直鏗額)이니 동포특합(東布特哈) 만내둔(滿乃屯) 사람이며, 장선(莊善)이니 제제합이 기(齊齊哈爾旗) 사람이고, 김순덕(金純德)이니 호란 한군기(呼蘭漢軍旗) 사람이다.

살펴보면 포특합(布特哈) 지방의 몽고는 원래 이 땅에 속하여, 주방(駐防, 수비대) 기인(旗人)은 나가서는 창을 지고서 전장터를 따랐고 들어와서는 기()에 딸린 부역을 담당하였다. 대자연의 황야에 힘입어 도처에서 말을 달리며 유목과 사냥을 하며 틈틈이 토질에 맞게 조금씩 농사 일을 하여서 먹거리를 마련해 나가는 것 외에 분배되어 다스려짐이 없는 강역(疆界)을 향하여 대단지의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일에 오롯이 힘썼다. ()나라 황제 때에 제위를 사양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고쳐 만들어 한(), (滿), (), (), () 이 다섯 겨레의 공화 국가가 성립된 초기에 이르러 이 해당 지역을 실제 조사하여서 개간하여 작물이 자랄 수 있는 곳은, 몽기촌락(蒙旗村落) 부근을 제하고 기호(旗戶)가 생계로 삼고 있는 땅을 구획하여 보존해둔 외에 나머지는 똑같이 부한황지(浮閑荒地)라 부르고 다 값을 받고서 풀어내어 개간할 호()를 불러오게 하였다. 이에 내지에 한족(漢族)들이 어지러이 와서 사람 집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가 바큇살 모이듯 빼곡하였다. ()이 다스려 조직을 창설하는 일은 경정문(經政門)에 자세히 다루었다.

 

위에서 나열한 포특합(布特哈) 지방의 명칭과 연혁을 살펴보면, 이와같이 그 토착 기인(旗人)은 색륜(索倫)과 달호이(達呼爾) 두 부()로 나뉜다. 색륜인(索倫人)은 만주어(滿語)를 톺아보자면 하 은 주 삼대(三代) 때에 숙신(肅慎)이요 한()나라 때에 색리(索離)요 위()나라 때에 물길(勿吉)이요 수()나라 때에 흑수 말갈(黑水靺鞨)이요 말갈(靺鞨)목극(木克)이 굴러 바뀐 소리와 관계가 되니 만주어를 한자()로 번역하면 ()”이다.오대(五代) 때에 여진(女真)이라는 인식이 분명하다. ()나라 이후에 금()과 만주(滿洲)의 북쪽 변경을 가지고서 부()를 구별하였다.

달호이인(達呼爾人)은 몽고어를 톺아보자면 순전히 당()나라의 몽올실위(蒙兀室韋), 거란(契丹)의 귀족인 요의 후손(遼裔)과 관계된다. 지금 내몽(內蒙)의 동북쪽과 만주(滿洲)의 북부는 이어 닿아 이웃한 한 부()인데 금()나라 초기에 피하여 북쪽으로 흑룡강(黑龍江) 상류 알란하(斡難河) 곧 악눈하(鄂嫰河), 곽패이하(郭貝爾河), 정기리강(精奇里江), 소도리하(蘇都里河) 곳들로 옮겨 가서 유목과 수렵 생활을 하였고 후에 그들이 살았던 하천의 이름으로써 성씨(姓氏)를 만들었다.

() 때에는 태조(太祖) 철목진 본부(鐵木真本部. 철목진은 곧 테무진, 칭기스칸)가 되었기 때문에 분봉할 강역의 차례에 있지 않았다. ()나라 때에 내지(청나라)로 붙은(內附) 이른바 달호이(達呼爾) 또는 달호리(達虎里)라는 것은, 거란(契丹)이 강성하였을 때 중원 사람(中國人)이 자기들 관() 밖에 있는 동호인(東胡人)을 존중하는 이름으로 대호인(大胡人)”이라 하였고, 이에 본족인(本族人) 역시 대호인(大胡人)이라 스스로 일컬었다. 거란(契丹) 임금의 호칭은 이에 따라 대하씨(大賀氏)”라 하였는데 후에 서적에 주석을 붙이는 과정에서 소리가 바뀌고 글자가 잘못되어 지금 이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땅에 늙은 토박이들이 전하는 말이 달호이인(達呼爾人)은 원()나라가 멸망한 뒤 흑룡강(黑龍江) 상류에 남겨져 살며 유목과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그 우두머리 되는 사람, 합란덕감칸(哈蘭德坎汗)과 그 아들 살길이적칸(薩吉爾迪汗)이 계속 통괄하여 다스렸고 이에 본족인(本族人)은 일찍이 그 조상인 칸()을 기록하였을 적에 살길이적(薩吉爾迪)의 이름을 모두 훤히 알아 추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나아가 그 옛일을 말할라치면 까닭 없이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나라 말기에 달호이인(達呼爾人)은 흑수(黑水) 북쪽 기슭에 떨어져 살며 외부와의 왕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드물어 소식을 통하지 못하는 바람에 역사에 기록되어 남겨 전해진 내용이 없어 문헌이 결핍되어 취할 자료가 없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아직껏 확실한 인증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선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전문 학자의 고증을 기다린다.

 

부도통(副都統)은 청나라 때 만든 관직 이름이다. 각지에 주둔한 주방팔기(駐防八旗)”의 장관을 도통(都統)”만주어로는 고산액진(固山額真)’이라 일컬으니 군사상 중요 지역 방어와 군()과 민()의 안녕과 조화, 정령(政令)과 형벌()의 공평함, 군사적 대비를 닦고 거행하는 일을 장악하였다. 주방장군(駐防將軍)을 설치하지 않은 곳, 예컨대 찰합이(察哈爾) 같은 곳은 도통(都統)이 바로 해당 지방의 행정장관(行政長官)이 된다. 주방장군(駐防將軍)을 설치하여 둔 곳에는 일반적으로 전성부도통(專城副都統)만주어로는 매륵장경(梅勒章京)’을 설치해 두니 정이품(正二品)으로 장군의 통제를 받는다. 주둔한 지역에 장군을 설치하지 않았을 경우, 이곳에만 주방기영(駐防旗營)이 최고 장관이 되어 전성부도통(專城副都統)이라 불렀다.

청대(清代)에 주방부도통(駐防副都統)이 있던 각 곳

성경(盛京)성경부도통(盛京副都統), 금주부도통(錦州副都統), 웅악부도통(熊嶽副都統), 금주 부도통(金州副都統), 흥경부도통(興京副都統)

길림(吉林)영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 백도눌부도통(伯都訥副都統), 삼성부도통(三姓副都統),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 아륵초객부도통(阿勒楚喀副都統), 납림부도통(拉林副都統), 훈춘부도통(琿春副都統)

흑룡강(黑龍江)흑룡강부도통(黑龍江副都統), 흑이근부도통(墨爾根副都統), 제제합이부도통(齊齊哈爾副都統), 포특합부도통(布特哈副都統), 호란부도통(呼蘭副都統), 호륜패이부도통(呼倫貝爾副都統), 통긍부도통(通肯副都統)

신강(新疆)이리부도통(伊犁副都統), 탑이파합태부도통(塔爾巴哈台副都統), 오로목제부도통(烏魯木齊副都統)

내지(內地)직예주방부도통(直隸駐防副都統), 밀운부도통(密雲副都統), 산동주방부도통(山東駐防副都統), 태원부도통(太原副都統), 찰합이부도통(察哈爾副都統), 귀화성부도통(歸化城副都統), 수원성부도통(綏遠城副都統), 강녕부도통(江寧副都統), 경구부도통(京口副都統), 복주부도통(福州副都統), 항주좌익과 우익부도통(杭州左右翼副都統), 형주좌익과 우익부도통(荊州左右翼副都統), 성도부도통(成都副都統), 광주부도통(廣州副都統), 서안부도통(西安副都統), 양장부도통(涼莊副都統), 영하좌익과 우익부도통(寧夏左右翼副都統) (바이두)

 

몽올실위(蒙兀室韋) : 몽국시위(蒙國豕韋), 몽올실위(蒙兀失韋), 실위(失圍)라고도 한다. 역사 문헌에서는 중당(中唐, 766~ 835) 이후로 실위를 달단(達怛), 달단(韃靼)이라고 기술하였다. 그 역사에서 동호(東胡) 겨레의 한 갈래로 보고 있으며 또한 현대 몽고 겨레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실위 겨레는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사이에 거주한 몽고 겨레의 한 갈래이다. 4세기 중엽에 스스로 거란(契丹)이라 부르던 선비(鮮卑)의 한 갈래가 황수(潢水)와 노합하(老哈河) 유역에서 살았고 흥안령 서쪽 호륜패이지구(呼倫貝爾地區, 내몽고자치구 동북쪽)에 살았던 선비의 한 갈래를 실위(室韋)라 일컬었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수서(隋書)에 나타난 내용에는 실위(室韋)와 거란(契丹), 해족(奚族)의 기원이 서로 같아 함께 동호(東胡)에서 기원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가깝다. 거란(契丹)의 북방에서 거주하여 말갈(靺鞨)에 가까이 있으면서 눈강(嫩江)과 흑룡강(黑龍江) 중상류에서 활동하였다. 수나라 때 실위(室韋)5()로 나뉘는데 남실위(南室韋), 북실위(北室韋), 발실위(鉢室韋), 심말달실위(深末怛室韋), 대실위(大室韋)가 그것이고 돌궐칸국(突厥汗國) 아래에 예속되었다.

 

() 태종(太宗) 정관(貞觀) 5(631)에 동돌궐칸국(東突厥汗國)이 당나라 군대의 와해 공작을 받고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였다. 8세기 당나라 기세가 한창일 때 실위(室韋)9()로 나뉘었으니 눈강(嫩江)과 흑룡강(黑龍江)이 합치는 곳 아래에 흑룡강 하도(黑龍江河道, 나하(那河)) 연안에 퍼져 산 사람들은 달말루부(達末婁部), 달구부(達姤部), 오라혼부(烏羅渾部), 황두부(黃頭部)가 되었다. 대흥안령(大興安嶺)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거구륜박(居俱輪泊, 지금의 달뢰호(達賚湖)) 남쪽에 오소고부(烏素固部), 이색몰부(移塞沒部), 색갈지부(塞曷支部)와 선부(鮮部, 또는 흑거자실위(黑車子室韋)가 된다. 지금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 연안에 살았던 서실위부(西室韋部), 대실위부(大室韋部), 지금 석륵객하(石勒喀河) 서쪽 강가에 살았던 몽올실위부(蒙兀室韋部)가 있다. 몽올실위(蒙兀室韋)는 훗날 몽고 제국의 핵심 부락이 된다.

 

다른 자료를 좀 더 살펴보자면 수나라 이전에 북실위에서 갈라져 나온 영서실위(嶺西室韋), 산북실위(山北室韋), 황두실위(黃頭室韋), 대여자실위(大如者室韋), 소여자실위(小如者室韋), 파와실위(婆萵室韋), 눌북지실위(訥北支室韋) 9()로 나뉘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영서실위는 파와실위(婆萵室韋)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소흥안령 북단 서쪽에 납모이하(納謨爾河) 유역에서 살았다 한다. 일설에는 외흥안령(外興安嶺) 남쪽에 서/석림목적하원(西/昔林木迪河源) 동쪽에 살았다고도 한다. 당나라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산북실위(山北室韋)는 북산부(北山部)라고 한다. 수나라 이전에 북실위(北室韋)를 말미암아서 갈라졌다. 구당서에는 나례부(那禮部) 동북에 있다 하였다. 그 살았던 위치에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대흥안령 살기산(薩起山) 북쪽에 낙민하(諾敏河) 유역, 다른 하나는 대흥안령 북쪽 끝 이륵호리산(伊勒呼裏山) ()쪽으로 지금에 흑룡강성 호마(呼瑪)와 애휘현(愛輝縣) 사이라고 한다. 오랜 이야기에는 합이()합하(哈爾()哈河)에 살았다고 한다. 이 부족은 실위 겨레 중에서도 강력하였었는데 당나라 이후에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여자실위(大如者室韋)는 대여자부(大如者部)라고도 한다. 뒤에 소여자실위와 합쳐 여자실위(如者室韋) 혹은 여자부(如者部)라고 하였다. 이 겨레는 소여자실위(小如者室韋)와 더불어 눈강(嫩江) 상류 서안에 지류인 감하(甘河) 유역에서 살았다 한다. 다른 이야기는 호마하(呼瑪河 옛날 호마이하(呼瑪爾河))에 살았다 하고 또는 지금에 흑룡강성 호마(呼瑪)와 애휘현(愛輝縣) 사이에 흑룡강 북쪽 땅에서 살았다 한다. 지금 추정하기를 당나라 후기 때 서쪽으로 이동하여 흑룡강 상류인 석륵객하(石勒喀河) 유역으로 이주하여 유절(())이라 일컬었으니 유절(())은 여자(如者)와 같은 소리인데 글자를 달리 풀어낸 것이다. ()나라 때에는 피피하(皮被河, 곧 석륵객하(石勒喀河))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우궐부(羽厥部)는 그 이름 역시 유절(俞折)과 같은 소리에 달리 풀어낸 글자이다. 소여자실위(小如者室韋)는 대여자실위와 엇비슷한 지역에서 살았다.

파와실위(婆萵室韋)는 남북조(南北朝) 때에 발실위(缽室韋)와 같은 소리였는데 달리 풀어낸 글자라 한다. ()은 급히 읽은 소리를 풀어낸 글자이고 파와(婆萵)는 느리게 읽은 소리를 풀어낸 글자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소여자실위(小如者室韋)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대흥안령 북단 이륵호리산(伊勒呼裏山) 북쪽에 반고하(盤古河, 또는 방조(旁烏), 평과(蘋果), 평과(平果), 평고(平庫), 방고(傍庫)라고도 함) 유역에 살았다 하고 더러는 러시아 경내의 외흥안령(外興安嶺) 남쪽, 석림목적하(昔林木迪河) 동북에 살았다고도 한다. 이 겨레 역시 당나라 이후에 역사 문헌에 보이지 않지만 일설에 금나라에 의해 파속화부(婆速火部)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한다.

7, 8세기 때 실위는 원나라에서 탑탑아(塔塔兒)로도 불리었으나 점차 달단(達怛)이라고 불렸으니 달단 겨레가 강성해진 여파라고 보고 있다.

10세기에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연안에 살던 거란(契丹) 사람이 흥기하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907년에 하칸(可汗)이라 칭하며 916년에 거란 8()를 통합하더니 해()와 흑거자실위(黑車子室韋)를 정복하여 대거란국(大契丹國)을 건국하였다. () 태종(太宗) 뒤에 실위(室韋)의 각 부()가 죄다 거란에 예속되었다.

 

12세기 중엽 몽올실위부(蒙兀室韋部)의 니륜부락(尼倫部落)은 칭기스칸의 선조 합부륵하(合不勒汗)의 이끔 아래에 액목이하(額木爾河, 아무르강) 서쪽을 따라 이동하여 알란하(斡難河), 토랍하(土拉河), 오이손하(烏爾遜河)의 발원지인 긍특산(肯特山) 땅으로 이르렀다.

 

13세기 초 1206년에 몽고니륜(蒙古尼倫)의 걸안부(乞顏部) 우두머리 칭기스칸이 당시 몽고 고원(高原)에 돌궐어를 쓰는 각 부락을 정복하고 알란하(斡難河, 지금 악눈하(鄂嫩河))에서 고력태(庫力台, 고리태(庫里台), 홀리륵태(忽里勒台), 홀린륵탑(忽鄰勒塔), 홀리태(忽里台)라고도 쓴다. 이는 몽고어로 모이다’, ‘모여 의논하다는 뜻이다) 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칭기스칸을 추대하여 대몽고국 대칸(大蒙古國大汗)으로 삼았으니 몽고제국(蒙古帝國)의 건립을 드러내 나타내었다.

 

바이두에 실린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몽올실위(蒙兀室韋)는 또한 몽국실위(蒙國豕韋)” “몽올실위(蒙兀失韋)”, “실위(失圍)”라고도 적는다. 중당(中唐) 이후에 문헌에서 실위(室韋)달단(達怛)”, “달단(韃靼)”이라 하였으니 역사상 동호(東胡)의 한 갈래이며 또 현대 몽고족의 선조이다.

그 겨레는 동호(東胡)에서 나왔으니,

동호(東胡), 이는 민족의 원류가 같고 다른 사투리를 구사하며 각각 이름을 가진 크고 작은 마을을 포괄하는 총칭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실린 내용을 근거하자면 흉노(匈奴) 동쪽에 살아서 동호(東胡)’라고 한다.” 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동호(東胡)의 각 부()는 원시 씨족 사회의 발전 단계에 있었고 각 마을은 풍속이 물과 풀을 따라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비(鮮卑)라는 이름이 되었으니,

원래 4세기 중엽, 선비인(鮮卑人)의 한 갈래로 스스로를 거란(契丹)”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황수(潢水, 서랍목륜하)와 노합하(老哈河, 서랍목륜하의 한 지류) 유역 일대에서 생활하였다. 흥안령(興安嶺) 서쪽에서 살던지금에 호륜패이(呼倫貝爾) 지구선비인(鮮卑人)의 한 갈래를 실위(室韋)라고 일컬었다. 실위(室韋)는 처음으로 위서(魏書)에 보이는데, 실위(失韋)로 적혀있다. 실위(室韋)는 거란(契丹)과 출신이 같은, 뿌리가 하나로 흥안령(興安嶺)을 경계로 하여서 남쪽에 사람들은 거란(契丹)이 되고 북쪽에 사람들은 실위(室韋)라고 불렀다.”북사(北史) 94 실위전(室韋傳)

蒙兀室韋又作蒙國豕韋”“蒙兀失韋失圍中唐以後文獻上又把室韋稱作達怛韃靼在曆史上是東胡一支也是現代蒙古族的祖先

族出東胡

東胡是包括同一族源操有不同方言各有名號的大小部落的總稱據司馬遷史記記載在匈奴東故曰東胡公元前5至前3世紀東胡各部還處於原始氏族社會發展階段各部落過著俗隨水草居無常處的生活

名成鮮卑

4世紀中葉鮮卑人的一支自號契丹生活在潢水和老哈河流域一帶居於興安嶺以西今呼倫貝爾地區的鮮卑人的一支稱爲室韋室韋始見於魏書》,作失韋室韋與契丹同出一源以興安嶺爲界南者爲契丹在北者號爲室韋(《北史94室韋傳》)。

 

布特哈志略 作者孟定恭 

布特哈地方伊古為窮荒之域土人隨各游牧處所而成部落其首領曰酋長部長每部各自為政中國治則通而來賓不治則叛而互相吞併爭為雄長至士馬日強土宇日廣恆與中國為敵此即三代之肅慎漢之索離魏之勿吉隋之靺鞨唐之室韋五代之女真代有興替名稱不一以至遼金元遞世興亡而以陳習爭尚武功文治缺然季清雖經居於黑龍江外五城之一因在武備之下未遑講文至於略有備具之檔案庚子俄亂焚毀一空典籍莫稽曷勝遺憾今則五族一家部落化為縣治牧地變成良田江山不可復識而人類又呈複雜於是恐其久將入於五里霧也爰徵求山川部落之古今名稱與士老遺傳之舊聞語音見諸史冊而符合者志歷代沿革

  布特哈古息慎氏地 山海經大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之國鄭氏康成說息慎即肅慎郭璞山海經註肅慎國去遼東三千餘里按不咸山即長白山肅慎指寧古塔黑龍江諸境而言則布特哈在其地矣孔子家語周武王時肅慎氏貢楷矢唐虞曰急慎竹書紀年帝舜二十五年息慎來朝貢弓矢是為東荒絕域國見於中國歷史之始云

 

  漢屬北夷索離國 索離魏略作櫜 離梁書作櫜離遼史作橐離後漢書云索離王出行其侍兒於後姙身而生男名曰東明王患其為禍也欲殺之東明遁南至掩??虒水以弓擊水魚鼈皆浮為橋行渡至扶餘地而王是為扶餘建國之始云按扶餘在吉林西北索離又在扶餘之北淹??虒水為難水即今之嫩江布特哈人隨嫩江流域落居者為多索離之後索倫人仍在該處不少且斯地土傳上古王與子生忌其子逃遁渡難水賴其魚鼈為橋事尚相符則現在之布特哈地方即古之索離境無疑矣

 

  魏為勿吉國黑水部 勿吉即古之沃沮又稱窩集烏稽阿集皆音轉所致沃沮係滿語譯漢森林也魏書勿吉在高句麗北舊肅慎國也北史云勿吉一曰靺鞨其部落凡有七種曰粟末 伯咄安車骨拂涅號室黑水白山魏延與中勿吉遣使乙力支朝貢從難河水道往返乙力支返國知魏不復東略南奪扶餘舊壤而疆理之隋書所稱靺鞨七部其基於是役云按難河者即今之嫩江土人至今以難水稱之則布特哈為其地無疑矣

 

  隋屬黑水靺鞨 靺鞨七部原屬勿吉最南者為白山部最北者為黑水部則布特哈屬黑水部境無疑也

 

  唐時嫩江以東為黑水府境嫩江以西為室韋地 靺鞨黑水部於唐高宗季年犯邊為李多祚擊破玄宗開元十年更為府拜其酋長李獻誠為黑水府都督時有室韋國在西東與黑水靺鞨為鄰服唐朝貢唐羈縻之契丹興遂為所有阻午可汗置突呂布部戍長春州西阿保機置突呂不室韋部戍泰州東北涅刺拏古部戍泰州東自嫩江以西索岳你 吉山以東俱役服之則布特哈其地無疑矣按室韋係錫窩之轉音即蒙語譯漢樹叢蓋因上古此處山深林密土人藏居其間出沒無常始爾得其名也

 

  五代時契丹屬生女真地 至五代時黑水靺鞨及渤海地皆附屬契丹蔓延於松花鴨綠間在松花江西南為熟女真松花江東北者曰生女真則布特哈在其地矣

 

  遼曰上京路東邊突呂不室韋部 遼上京臨潢府即今內蒙巴林東北一百四十里之坡羅城契丹耶律阿保機挫敗室韋而置突呂不室韋部戍泰州東北其地自嫩江以西索岳爾吉山以東則屬布特哈矣按耶律係蒙語磊落光明之意阿保係鄂博之轉音即土堆之謂機係額齊之平音併簡即頭也蓋因其人尖頂性情磊落而得姓名者也

 

  金屬蒲輿路泰州地 金蒲興路南至上京六百七十里東南至胡里改一千四百里今黑龍江以西松花江以北嫩江左右係以扶餘得名即明之福餘衛地惟疆界贏縮互殊耳時金宗室婆盧火從太祖攻黃龍府及平東方諸部以功授謀克天輔五年太祖以舊部瘠鹵不如泰州腴可種遂擇諸猛安謀克中民戶萬餘使婆盧火統之屯於泰州地泰州者故契丹二十部族牧地遼之長春州是也金兵既西略諸部族咸西北徙為邊患婆盧火內修農業外飭邊備起達里帶石堡子達里帶石者屏蔽也西南直抵臨潢浚壕立界為堡二十有四史所稱長春邊堡是也其跡迄今在西布特哈總菅 署北三里之遙起自嫩江右岸西南直抵直隸圍場屹屹若長城可稽則布特哈為泰州地無疑矣

 

  元屬黑水府達達路為東北諸王封地 契丹盛時他部可以紀者有塔塔爾泰赤烏有達達女真代興咸隸屬焉元太祖帖木真幼與札木合戲氷斡難河即鄂嫩河長為塔塔爾部長遊牧捕魚兒闊連兩海子間兀兒失溫上即今之呼倫貝爾烏爾順河女真達達遠 衍文路在其東云至於元初封建諸王於東方自臨潢東北泰寧路松花嫩江等處皆別里古台封地則布特哈在其境矣元為蒙古即東胡匈奴鮮卑突厥回紇更迭占據之地唐時有蒙兀室韋為此族之起源蒙兀之先嘗服屬於東胡東胡族即通古斯之轉音故人種學家稱其同出於東胡族至金時合不勒為部長自號大蒙古國即蒙兀之轉音成吉斯汗時兵力真 達歐州泰西人因以蒙古為黃種之代表同稱黃種為蒙古利亞種云

 

  明屬福餘衞 明初以元後烏梁海置外衞自大寧歷喜峰近宣府曰朵顏衞本元之朵顏元帥府也迨成祖棄大寧以賜朵顏其地益廣今熱河特別區及其北境之地皆屬之西界泰寧衞北界福餘衞正統十二年衞拉特強盛以兵侵三衞朵顏泰寧皆不支乞降惟福餘衞長奎孟克率所部走嫩江據其地而國則布特哈在福餘境無疑矣福餘係金之蒲與即扶餘之轉音

 

  清曰布特哈 清係滿洲愛新覺羅氏愛新者譯漠金也滿洲之在關東自稱為朱申即女真之轉音則生女真阿骨打滅遼建金清為其後無疑三代之肅慎即女真之先祖肅慎之轉音為女真猶如女真之轉音為朱申至布特哈者譯漢打牲也蓋因土人打牲生活得名

 

  康熙二十八年設置總管衙門駐防於嫩江右岸宜臥奇地方轄理該處八旗事宜 八旗係廂黃正黃正白正紅廂白廂紅正藍廂藍等八色旗旂 清制國軍專由旗戶分旗編練以備用武布特哈地方因有達呼爾索倫等部落人雜居設九十二佐分編八旗統設總管衙門一置索倫達呼爾滿洲三總管合理之衙署建於西北倚金遼邊堡東南臨嫩江流域及尼爾吉渡口山環水抱之宜臥奇後屯其轄境西南自索岳爾吉山起西北經呼倫貝爾以內興安嶺為界東北與墨爾根即今之嫩江縣連界東南行訥謨爾河源經呼蘭齊齊哈爾即與今之龍江縣為界同治季年以後歷任滿洲總管曰諾們德勒和爾巴彥蒙庫良忠富爾增布均為齊齊哈爾旗人達呼爾總管曰薩尼布東布特哈他本沁屯人曰胡格精額東布特哈霍奇屯人曰業普春東布特哈德都拉屯人索倫總管曰富勒興阿東布特哈開闊沁屯人曰文成東布特哈托木沁屯人曰恩特恒額東布特哈嘎布喀屯人曰凌豐阿西布特哈阿爾拉屯人其同治季年以前官名因庚子俄亂布哈衙門檔案在博爾多副都統衙門同時焚毀殆盡以致無從查考暫付闕如其衙門內部之組織分戶司兵司堂司每一司說 正堂一人副堂一人司官筆帖式各若干人書記亦若干人分擔各該司內事宜

 

  光緒二十年裁併三總管改置副都統總理其事其衙門移設於嫩江東五十里訥謨爾河北岸博爾多站地方 博爾多站即今之訥河縣舊街基訥河縣係以訥謨爾河得名具歷任副都統曰業普春東布特哈德都拉屯人係以總管升充曰額勒精額東布特哈伯爾科屯人曰雙福齊齊哈爾旗人副都統衙門內部之組織仍如總管衙門分三司惟其司官筆帖式員額較前增多耳

 

  光緒三十二年裁撤副都統就原有旗屯坐落以嫩江分界劃為東西兩路布特哈各分組八旗設總管一人掌本路旗屬事宜 舊設九十二佐至是悉裁撤 每路布特哈新組八旗旗設佐領一人驍騎校一人歸各本路總管轄理兩路總管署內織仍分二司惟其司員筆帖式員額較前副都統衙門減少耳

 

  東路布特哈總管衙門仍設於副都統衙門舊基至民國初裁撒 總管改為八旗籌辦處設總辦一人文牘一人譒譯一人辦理籌劃旗屬生計事宜地方行政創設訥河縣公署治理之 其歷任總管曰福齡齊齊哈爾旗人曰純德呼蘭旗人籌辦處總辦曰德宏東布特哈開闊沁屯八曰額勒春東布特哈溫察爾屯人

 

  西路布特哈總管衙門移設於嫩江西岸宜臥奇後屯舊總管衙門處民國十年創設布西設治局地方行政事宜歸局治理局址建於尼爾吉城基總管署亦移於設治城內辦理籌劃旗屬生計事宜 其歷常 總管曰常雲西布特哈凱和屯人曰明德東布特哈多金屯人曰任 慶齊齊哈爾旗人曰直鏗額東布特哈滿乃屯人曰莊善齊齊哈爾旗人曰金純德呼蘭漢軍旗人 按布特哈地方蒙古原屬斯地駐防旗人出則荷戈從戎入則負擔旗役賴天然荒野到處馳驅牧獵間隨土宜稍事耕種以維口食外向無分理疆界開闢大叚地畝專務農田之事至清帝遜位改為中華民國漢滿蒙回藏五族共和國家成立之初查勘該處為可以墾殖除蒙旗村落附近劃留旗戶生計地外餘均謂之浮閑荒地悉收價出放招徠墾戶於是內地漢民紛紛來居人烟輻輳縣治創組事詳經政門

 

  按上列布特哈地方名稱沿革如是其土著旗人則分索倫達呼爾兩部索倫人按滿語認明確為三代之肅慎漢之索離魏之勿吉隋之黑水靺鞨 靺鞨係木克之轉音滿語譯漢水也五代之女真金後即金及滿洲之北邊別部達呼爾人按蒙語純係唐之蒙兀室韋契丹之貴族遼裔即今內蒙之東北與滿洲北部接連為鄰之一部金初避而北移黑龍江上游斡難河 即鄂嫰河郭貝爾河精奇里江蘇都里河等處牧獵生活後以所居河流之名稱而得姓氏元為太祖鐵木真本部故不在封疆之列至清內附所謂達呼爾或達虎里者契丹盛時中國人以其關外東胡人尊稱曰大胡人於是本族人亦以大胡人自稱契丹之君號因之曰大賀氏嗣經註籍音轉字誤致為今名斯地土老遺傳達呼爾人自元滅後遺留於黑龍江上游地方遊牧漁獵生活時領首者曰哈蘭德坎汗及其子薩吉爾迪汗繼續統轄於是本族人曾記祖來之汗薩吉爾迪之名無不知曉尊崇且道其故事者則不能不謂無因惜明季時代達呼爾人隔居黑水北岸稀尚往來消息不通致無史紀遺傳文獻缺乏無所取材未即確認為是姑記之以待專門名家之考定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