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명나라 올량합 삼위 (兀良哈 三衛) 에 대한 자료이다.
흠정고금고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方輿彙編) 변예전(邊裔典) 제124권 상
산융부 휘고(山戎部彙考) 1 〈해(奚) 고막해(厙莫奚) 올량합(兀良哈)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령(泰寧) 삼위(三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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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 주원장)가 설치한 삼위(三衛)이다. 그 땅은 올량합(兀良哈)이 되니 흑룡강(黑龍江) 남쪽 어양(漁陽) 변방(塞) 북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는 선비(鮮卑), 당(唐) 때에는 토곡혼(吐谷渾), 송(宋) 때에는 거란(契丹)이 모두 그 종류들이다. 원(元)나라 때는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었다. 고황제가 중원 땅을 통일하니 동쪽 울타리인 요왕(遼王), 혜녕왕(惠寧王), 타안 원수부((朵顏元帥府)가 서로를 이끌고서 안으로 붙기를 간청하여 이에 옛 회주(古會州) 땅에 대녕도사(大寧都司), 영주제위(營州諸衛)를 설치하고, 주원장 아들 권(權)을 영왕(寧王)을 삼고서 그 지역을 진정시키게 하였다. 이미 몇 번이나 달단(韃靼)에게 약탈을 당하였다.」 하였다.
명회전(明會典)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타안위(朵顏衛), 복여위(福餘衛), 태녕위(泰寧衛), 올량합(兀良哈)은 곧 옛 산융(古山戎)이니 훗날에 고막해(厙莫奚)라고 일컬어지는데 오룡강(烏龍江) 남쪽과 어양새(漁陽塞) 북쪽에 있다. 원(元)나라 때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다. 명나라 초기에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를 마련하였다. 홍무(洪武) 14년(1381년), 대녕(大寧) 땅에 아들 권(權)을 봉하여 영왕(寧王)으로 삼았다. 21년 요왕(遼王), 혜녕왕(惠寧王), 타안 원수부(朵顏元帥府) 원수(元帥) 등이 각각 사신을 보내와 알현하였다.」
홍무(洪武) 22년, 처음으로 태녕(泰寧), 타안(朵顏), 복여(福餘) 3위(三衛)를 설치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홍무(洪武) 22년에 마침내 태녕(泰寧), 타안(朵顏), 복여(福餘) 삼위 지휘사사(三衛指揮使司)를 설치하고 그 두목(頭目)으로 하여 각자 독자적으로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지원하게 하였다. 대녕(大寧) 앞에서 희봉구(喜峰口)에 이르러 선부(宣府)에 가까운 구역을 “타안(朵顏)”이라 하고 금(錦), 의주(義州)에서 광녕(廣寧)을 거쳐 요하(遼河)에 이른 구역을 “태녕(泰寧)”이라 하며 황니와(黃泥窪)에서 심양(瀋陽)의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에 이른 구역을 “복여(福餘)”라 하였다. 이 중에 타안(朵顏)만은 땅이 험하고 강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모두 반기를 들어 등을 돌렸다.」 하였다.
명회전(明會典)을 살펴보면
「22년 드디어 올량합(兀良哈)을 나누어 횡수(橫水) 북쪽에다 삼위(三衛)를 만들었으니 “타안(朵顏)”이라 하고, “복여(福餘)”하고, “태녕(泰寧)”이라 하여서 항복한 호(胡)를 관리하며 지휘사(指揮使) 등에 관직을 제수하고서 각각 관과 띠(冠帶)를 하사하여 각자 관할하고 있는 부(部)를 거느리게 하였다.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泰寧) 삼위(三衛)의 차사(差使)를 보내는 일에서, 모두 스스로 도독(都督 : 중앙에 둔 전국 군정(軍政) 총괄 기구)에 차사를 보내오면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 안감과 겉감을 아우른 말) 넷, 비단(絹) 두 필(匹)을 상으로 내리고, 도지휘(都指揮 : 지방 최고의 군사기구)에 차사를 보내오면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셋과 비단(絹) 두 필(匹)을 선물로 내렸다. 지휘(指揮), 천백호(千百戶)로서 군대를 주둔하고 지키면서 지역을 안정시키는 두목들에게는 각 사람에게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둘과 비단(絹) 한 필, 그리고 각각 금실을 두어 짠 옷 한 장, 금실과 모시 실(金紵絲)로 짠 옷 한 벌(一套)을 주고, 또 각각 고급 비단(綵段) 옷감(表里) 하나를 더해 주었다. 사인(舍人)에게는 각 사람에게 고급비단(綵段) 옷감(表里) 둘과 비단(絹) 한 필, 금실로 짠 옷 한 벌(一套), 달자(達子, 수행원(從人))에게는 사람마다 고급 비단(綵段) 안감 겉감의 옷감(表里) 하나, 비단 한 필, 흰 모시 실로 짠 옷 한 벌(套)을 상으로 주었다. 부녀(婦女)가 공물을 올릴 경우, 각 사람에게 안감 겉감의 옷감(表里) 하나와 비단(絹) 한 필, 모시 실로 짠 여자 옷 한 벌(套)을 상으로 내렸다. 부녀를 따라온 사람에게는 안감 겉감의 옷감 하나, 비단(絹) 한 필, 여자 옷 한 벌 이상, 가죽신(靴)과 버선(襪) 각 한 켤레씩을 선물로 내렸다. 황제에게 사정을 자세히 아뢰며 공물을 올릴 때, 도지휘(都指揮)에게는 비단 한 필, 고급 비단(綵段)으로 안감 겉감의 옷감 셋, 금실로 짠 옷 한 벌(套)을 선물로 내리고 지휘(指揮) 각 사람에게 비단 한 필, 견직물과 삼베(綿布) 한 필, 고급 비단(綵段) 겉감 안감의 옷감 둘, 모시 실로 짠 옷 한 벌(套), 가죽신과 버선(靴襪) 각 한 켤레를 상으로 내렸다. 사인(舍人)이 어떤 일 때문에 공물을 올리는 경우, 각 사람에게 고급 비단(綵段) 안감 겉감의 옷감(表里) 하나, 금실로 짠 옷 한 벌(套), 비단 한 필(匹), 가죽신과 버선 각 한 켤레씩을 상으로 내렸다.」 하였다. 〈천백호(千百戶) : 평소에는 농민 조직이요, 전시에는 군대 조직이 된다. 일반적으로 1천 호에 천호(千戶) 1명, 1백 호마다 백호(百戶) 1명을 두었고 5십 호마다 백총(百總)을 두었다 한다〉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살펴보면
「올량합(兀良哈)은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으로 개평(開平)의 경계에 연결되었으며 북쪽으로 북해(北海)에 이른다. 이곳은 본디 춘추(春秋) 시대에 산융(山戎)의 땅이었고 진(秦) 때에는 요서군(遼西郡)의 북쪽 지경이었으며 한(漢) 때에는 해 겨레의 추장(奚酋)이 틀어쥐었던 곳이다. 동한(東漢) 때 이곳을 정벌하여 깨뜨리니 해 겨레의 추장이 송막(松漠) 지역 사이로 달아나 숨었다. 후위(後魏)의 선조가 이곳을 다시 차지하였으니 고막해(厙莫奚)라 불렀다. 훗날 거란(契丹)에 복종하여 예속되었고 원(元) 때에는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었다. 우리 명나라 홍무(洪武) 22년(1389년), 북호(北胡)를 정벌하여 깨뜨렸을 때 항복해온 무리를 명(明) 태조가 조서를 내려서 올량합(兀良哈)의 땅에 태녕(泰寧), 타안(朵顏), 복여(福餘) 삼위(三衛)를 설치하고서 이들을 살게(居) 하여 동북의 바깥 울타리(外藩)로 삼았고 그 우두머리에게 명하여 지휘사(指揮使), 지휘동지(指揮同知)를 맡아서 각각 그 인솔하고 있는 부(部)를 거느리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朝貢)하였다. 」
인종(仁宗) 홍희(洪熙) 원년(元年, 1425년), 삼위(三衛)에 조서를 내려 ‘이왕의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는 것(自新)’을 허락하였다. 복여위(福餘衛)가 인장(印)을 도적에게 빼앗겨 인장을 청하는 주청을 올리니 이를 허락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인종(仁宗)이 지위를 잇고 삼위(三衛)에 조서를 내려 이왕의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을 허락하였다. 홍희(洪熙) 원년(元年), 안출(安出)이 그 인장을 도적에게 빼앗기고 다시 발급해주기를 청하였다. 인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겨울에 삼위(三衛) 두목(頭目) 아자독(阿者禿)이 와서 귀순하니 천호(千戶)를 주고 초폐(鈔幣, 곧 종이돈), 습의(襲衣 : 예를 행할 때 웃옷 위에 입는 옷), 안장 딸린 말(鞍馬)을 하사하고 그대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술과 음식(供具)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귀순해오는 사람들은 다 이대로 대우하였다. 」 하였다.
선종(宣宗) 선덕(宣德) 원년(元年) (1426년), 삼위(三衛)가 영평(永平)과 산해(山海)를 노략하자 제(帝)가 장수가 되어 몸소 이들을 토벌하였다. 삼위(三衛)가 사죄하니 이들을 다독이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선종(宣宗) 초에, 삼위(三衛)가 영평(永平)과 산해(山海) 사이를 노략질하였다. 제(帝)가 장수가 되어 몸소 이들을 토벌하니 삼위(三衛)의 두목들이 모두 사죄하고 공물을 들였다. 조정(朝廷)에서 다독이며 이들을 받아들인 것이 처음처럼 하였다. 」라 하였다.
명회전(明會典)을 살펴보면
「올량합(兀良哈)이 선덕(宣德, 1426년—1435년) 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하였는데 그 사신들이 오는 길에서 차와 먹거리를 대접하게 하였다. 선덕(宣德) 7년, 삼위(三衛) 두목이 우리 조정을 공순 섬긴 지 오래되었기에 금폐(金幣)를 차등 있게 더해 주었다. 」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 복여 태녕전(朵顏福餘泰寧傳)을 살펴보면, 「선덕(宣德) 7년, 태녕위인(泰寧衛印)을 다시 지급하였다. 그 가을, 타안(朵顏) 두목 합라합손(哈剌哈孫)과 복여(福餘) 두목 안출(安出), 그리고 태녕(泰寧) 두목 탈화적(脫火赤) 들이 조정(朝廷)을 공순히 섬긴 지 오래되었다 하여서 금실과 짠 비단 안감과 겉감을 차등이 있게 더해 주었다.」 하였다.
영종(英宗) 정통(正統, 1436년 – 1449년) 때 삼위(三衛)가 들어와 도적질하였고 서몽고(西蒙古) 와랄의 야선(瓦剌也先)에 몰래 붙었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사이에 여러 차례 요동(遼東), 대동(大同), 연안(延安)의 경내로 들어와 도적질하였는데 독석(獨石, 지금 하북성 고원현(沽源縣) 독석구(獨石口))를 수비하고 있던 양홍(楊洪)이 이들을 쳐 깨뜨리고 그 두목 타란첩목아(朵欒帖木兒)를 사로잡았다. 얼마 있다 다시 와랄(瓦剌)의 야선(也先)에 붙었다. 태녕(泰寧)의 졸적(拙赤)이, 야선(也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니 모두 남몰래 그 눈과 귀가 되었다. 공물을 들일 때면 번번이 이름을 바꾸었고 서로 그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광녕(廣寧) 전둔(前屯)에도 침입하였다. 제(帝)가 그들의 왔다리갔다리하는 모습을 미워하였다. 」 하였다.
정통(正統) 9년, 성국공(成國公) 주용(朱勇)들에게 명을 내려 삼위(三衛)를 정벌하게 하니 이들을 깨뜨렸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9년 봄, 성국공(成國公) 주용(朱勇)에게 명하여 공순후(恭順侯) 오극충(吳克忠)을 데리고 희봉(喜峰)으로 나가고 흥안백(興安伯) 서향(徐亨)은 계령(界嶺)으로 나가고 도독(都督) 마량(馬亮)은 유가구(劉家口)로 나가고 도독(都督) 진회(陳懷)는 고북(古北)으로 나가서 각자 정예병 만 명을 이끌고 나누어 삼위를 소탕하게 하였다. 용(勇) 등이 변방을 소란하게 한 자들을 체포하여 궐 앞에 보내고 아울러 약탈을 당한 사람과 가축들을 도로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적(拙赤) 등이 비하위(肥河衛)를 취하고는 사인(使人, 노복)을 살해하였다. 비하위(肥河衛) 두목인 별리격(別里格)이 격로곤질련(格魯坤迭連)에서 졸적과 전투를 벌였는데 졸적(拙赤)이 크게 패하였다. 와랄(瓦剌)이 다시 길을 나누어 막고서 공격하여 죽이는데 별리격이 군사들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니 삼위(三衛)가 크게 곤란에 빠졌다.」 하였다.
*위 지도는 금고여지도(今古輿地圖) 3권에 나오는 지도이다. 명(明) 숭정(崇禎) [ 1628 - 1644] 때 제작한 것이라 한다. 지도 위쪽, 장성 표시된 위로 올량합과 대녕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서 내려받았다.
*지도총요(地圖總要)에 나오는 올량합 삼위 지도이다. 명나라 때, 대략 1643년에 제작되었다 한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서 내려받았다.
정통(正統) 12년 총병(總兵) 조의(曹義)등이 삼위(三衛)를 쳐서 깨뜨렸고 와랄(瓦剌)이 다시 크게 노략질을 하니 삼위가 야선(也先)에 항복을 간청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12년 봄, 총병(總兵) 조의(曹義), 참장(參將) 호원(胡源), 도독(都督) 초례(焦禮) 등이 나누어서 동쪽 변방을 순시하다가 삼위(三衛)가 들어와 도적질하는 것을 마주치고서 이들을 약탈하고 공격하여 함께 32명의 목을 베었고 70여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 해에 와랄 새간왕(瓦剌賽刊王, 야선(也先)의 아우)이 다시 타안(朵顏)의 내아불화(乃兒不花)를 공격하여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서 떠났다. 야선(也先)이 이어 이르렀으니 타안(朵顏), 태녕(泰寧) 모두 지탱하지 못하고 항복을 간청하였고 복여(福餘) 올로 달아나 뇌온강(腦溫江)으로 피하였다. 이에 삼위(三衛)는 더욱 쇠퇴하였고 강성한 와랄(瓦剌)이 두려워 감히 등을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해마다 명나라 조정에 와서 공물을 바쳤으니 그저 중국에서 하사한 선물을 이롭게만 여겼을 뿐이었다. 또 마음에는 변장(邊將)을 소탕하여 살해한 일을 품고 있었기에 늘 몰래 보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 하였다.
정통(正統) 14년 석향(石亨) 등이 삼위(三衛)를 쳐 깨뜨리니 삼위(三衛)가 와랄(瓦剌)을 대거 인도하여 들어와 도적질하였는데 상(上)이 이 때문에 북쪽으로 진군(北狩)하는 일을 벌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통(正統) 14년 여름, 대동참장(大同參將) 석형(石亨) 등이 그 변방을 후리는 자들을 전계산(箭谿山)에서 다시 공격하여 사로잡거나 참수한 사람이 50명이니 삼위(三衛)가 더욱 원망하였다. 그해 가을, 와랄(瓦剌)을 대거 인도하여 들어오니 영종(英宗)이 마침내 이 때문에 북쪽으로 군대를 진군시키는 일을 벌였다. 」 하였다.
대종(代宗) 경태(景泰, 1450년 ~ 1457년 1월) 때, 사신을 보내 삼위(三衛)를 다독이고 타일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경태(景泰) 초, 조정(朝廷)이 사신을 보내 삼위(三衛)를 다독이고 타일렀다. 삼위(三衛)가 야선(也先)의 뜻(旨)을 받아들여서 자주 때아닌 때에 명나라 조정에 공물을 들이고서, 대부분 사신을 보낼 때 오가는 길에 나라 안을 사찰하게 하였다. 이윽고 야선(也先)이 삼위를 잔혹하게 부려먹고 다시 타안(朵顏)이 인솔한 부(部)를 황하(黃河) 모납지(母納地)로 호되게 독촉하여 옮기게 하니 삼위(三衛) 모두가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몰래 와랄(瓦剌)의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고 변경 가까이에서 주둔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옛 제도에 삼위(三衛)는 해마다 세 번에 걸쳐 공물을 들이는데 그 공물을 올리는 사신(貢使)들은 모두 희봉구(喜峰口)에서 면밀한 검사를 거쳐 들어오고, 급한 보고가 있을 때면 영평(永平)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때에 삼위(三衛)의 사신이 독석(獨石)과 만전 우위(萬全右衛, 만전은 장가구(將家口))에서부터 온 사람이 있었는데 변신(邊臣)이 그 사신의 행동에 대해 “이 길은 칙령으로써 금지하였다.”라고 알렸다.」
*1582년 순천부(順天府)를 묘사한 지도이다. 희봉구, 독석(獨石)과 만전 우위(萬全右衛), 영주(榮州) 제위(諸衛), 타안과 달단(韃靼) 등의 위치를 볼 수 있다. 바이두에서 내려받았다.
헌종(憲宗) 성화(成化) 원년(元年, 1465년), 삼위(三衛)의 타라간(朵羅干)이 들어와 도적질을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순천(天順, 영종(英宗)의 연호, 1457년 1월 ~ 1464년) 중에 한번은 틈을 타서 여러 변방 지역을 노략질하고 다시 슬그머니 달단(韃靼)의 패래(孛來)와 내통하고 매번 그를 위해 길잡이를 하였다. 삼위가 보낸 사신과 패래(孛來)의 사신이 함께 영종(英宗)을 알현하고서 명나라가 달단(韃靼)에 대한 대접이 두터우니 그보다 더한 상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이에 크게 분노하더니 드디어 패래(孛來)와 더욱 끈끈하게 관계를 맺었다. 성화(成化) 원년(元年), 그 두목 타라간(朵羅干) 들이 군대로써 패래(孛來)를 따라 대거 요하(遼河)로 들어왔다. 얼마 있다가 다시 서쪽으로 모리해(毛里孩)에게 붙었고 동쪽으로 해서(海西)의 군대와 연합하여 자주 변방(塞)을 침입하였다. 또 때때로 독자적으로 광령(廣寧), 의주(義州) 사이에 출몰하였다.」 하였다. 〈패래(孛來)는 15세기 몽고본부(韃靼國) 부족장, 객라심부(喀喇沁部) 사람. 위랍특 몽고(衛拉特蒙古)의 야선(也先)이 죽은 뒤에 몽고 동부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이끌었고 나란히 야선(也先)을 본떠 스스로 태사회왕(太師淮王)이라 하였다)〉
성화(成化) 9년(1473년), 삼위(三衛)가 요동(遼東)에 들어와 도적질하니 총병(總兵) 구신(歐信)이 이들을 쳐 무찔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9년, 요동 총병(遼東總兵) 구신(歐信)이 편장(偏將) 한빈(韓斌) 들로서 중흥(興中)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추격하여 맥주(麥舟)까지 이르렀으니 머리를 벤 사람이 62명이었고 획득한 말과 가축, 기계가 거의 수천이었다. 그해에 희봉(喜峰)의 수장(守將) 오광(吳廣)이 뇌물에 환장하여서 삼위(三衛)의 마음을 잃어 삼위(三衛)가 들어와 범하여 광(廣)을 옥에 보내 죽이었다. 」 하였다.
성화(成化) 10년, 삼위(三衛)가 들어와 개원(開原), 경운(慶雲)에서 도적질하니 참장(參將) 주준(周俊)이 이들을 물리쳤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10년, 다시 개원(開原), 경운(慶雲) 땅을 약탈하고 참장(參將) 주준(周俊)이 이들을 쳐 물러가게 하였다. 」 하였다.
성화(成化) 14년, 조서를 내려 「삼위마시(三衛馬市)」를 다시 마련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14년, 조서를 내려 삼위 마시(三衛馬市)를 다시 마련하게 하였다. 초에 국가에서 요동 마시(遼東馬市) 세 곳을 마련하였으니, 하나는 성동(城東)에다, 또 하나는 광령(廣寧)에다 차렸는데 두 말 시장 모두 삼위(三衛) 사람들을 허락하였다. 정통(正統, 1436~1449) 사이에 그 부(部)의 무리가 여러 차례 반기를 들어서 이곳(마시)을 파하였다. 때마침 달단(韃靼)의 만도로(滿都魯)가 포악하고 강성하여서 삼위(三衛)를 침입하여 약탈하여 삼위(三衛)의 두목이 모두 변방(塞) 밑으로 피하여 달아나다 보니 여러 차례 굶주림과 어려움이 있어 다시 말 시장을 열게 해주기를 두 번 세 번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순무(巡撫) 진월(陳鉞)이 그들을 위해 말씀을 올리니 비로소 그 청을 허락하였다. 만도로(滿都魯)가 죽고 역시 사마(思馬)가 병권을 주도하는 바람에 삼위(三衛)가 다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
성화(成化) 22년(1486년), 달단(韃靼)의 별부(別部)인 나해(那孩)가 삼위(三衛)를 크게 약탈하여 삼위(三衛)가 변방 근처로 도망하여 숨으니 헌종(憲宗)이 조서를 내려 이들을 넉넉하게 돌보게 하였다.」 하였다. 〈말시장(馬市)의 나머지 하나는 ‘개원(開原) 남관(南關)에 있었고 해서(海西)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다. 一在開原南關,以待海西〉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성화(成化) 22년, 달단(韃靼)의 별부(別部)인 나해(那孩)가 다시 삼만 무리를 거느리고 대녕(大寧)의 금산(金山)에 들어와 노하(老河)를 건너 삼위(三衛) 두목 백안(伯顏)들을 공격하여 죽이고 만(萬)으로 계산되는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여 갔다. 삼위(三衛)가 마침내 노약자를 서로들 이끌고서 변방으로 달아나 숨었다. 변신(邊臣) 유잔(劉潺)이 이 일을 아뢰니 조서를 내려 말의 먹거리인 꼴(芻)과 사람이 먹을 식량을 주어 넉넉하게 이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 하였다.
효종(孝宗) 홍치(弘治, 1488년 – 1505년) 때, 삼위(三衛)가 여러 번 고북(古北), 개원(開原) 땅에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다. 얼마 있다가 소왕자(小王子)에 의해 약탈을 당하자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자기 죄를 아뢰니 이를 용서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홍치(弘治) 초에 삼위(三衛)가 늘 고북(古北), 개원(開原) 땅을 도둑질하며 약탈하였다. 이미 죄를 뉘우치고서 수신(守臣) 장옥(張玉), 총병(總兵) 이고(李杲) 들이 속임수를 두어 일을 꾸몄다는 핑계로 그 장마당에 온 300사람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북쪽으로 탈라간(脫羅干)과 우호를 맺고 죽은 이들을 위해 원수를 갚기를 청하고 자주 광녕(廣寧), 영원(寧遠)의 여러 곳을 약탈하였다. 때에 해서(海西) 땅에 상고(尚古)란 자가 명나라에 공물을 바칠 수 없자 반기를 들고서 자주 군대로서 여러 변방의 나라가 공물을 들이려고 가는 길을 막으니 여러 변방의 나라가 아울러 이를 원망하였다. 조정(朝廷)이 곧바로 상고(尚古)가 바치는 정성을 받아들이기로 허락하였다. 이에 무녕 맹극(撫寧猛克) 첩목아(帖木兒)들이 모두 상고(尚古)를 구실삼아서 요양(遼陽) 땅에 들어와 도적질하고 죽이며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얼마 있다가 달단(韃靼)의 소왕자(小王子)가 여러 차례 삼위(三衛)를 약탈하자 삼위(三衛)가 각각 관문(關門)을 두드리고서 자기 죄를 실토하였다. 조정(朝廷)이 그 뉘우침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겉으로만 공순한 체 하였을 뿐이다. 타안 도독(朵顏都督) 화당(花當)이란 자가 그 땅이 험난한 것을 믿고 교만하여 들이는 공물을 더 많게 하고서 받는 상을 더해 주기를 자주 청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 하였다.
무종(武宗) 정덕(正德) 10년(1515년), 타안 도독(朵顏都督)이 자기 아들 파아손(把兒孫)을 보내어, 들어와 약탈하게 하니 부총병(副總兵) 두용(杜勇)에게 명하여 이들을 막도록 명하였는데 마침내 파아손(把兒孫)을 숨겨놓고 그 아들 타합(打哈) 들을 사신으로 명나라 조정에 들여보내어 죄에 대한 벌을 받기를 청하였는데 무종(武宗)이 조서를 내려 이들을 풀어주게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덕(正德) 10년, 화당(花當)이 그 아들 파아손(把兒孫)에게 기병 천 명을 딸려 보내 염어관(鯰魚關)에 들어가 훼손시키고 마란곡(馬蘭谷)을 크게 노략질하게 하였다. 참장(參將) 진건(陳乾)이 이들과 싸우다 죽었다. 다시 5백 기병을 데리고 판장곡(板場谷)에 다시 들어왔고 기병 천명이 신산령(神山嶺)으로 들어왔다. 또 천여 기병이 수계동(水開洞)으로 들어왔다. 이 일을 아뢰니 부총병(副總兵) 두용(杜勇)에 명하여 이들을 막게 하였다. 화당(花當)이 곧바로 물러나서 홍라산(紅羅山)에 주둔하고 파아손(把兒孫)을 숨겨놓고서 그 아들 타합(打哈) 들을 사신으로 명나라 조정에 들여보내 죄에 대한 벌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이들을 풀어주고 죄를 따지지 말게 하였다. 」 하였다.
정덕(正德) 13년, 파아손(把兒孫)이 죽고 그 아들 백혁(伯革)이 공물을 들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정덕(正德) 13년, 제(帝)가 순행(巡幸)을 하여 대희봉구(大喜峰口)에 이르렀다. 장차 삼위(三衛) 두목들을 불러다 죄다 관문(關門) 아래에 나아오게 하여 잔치를 열어 위로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어사(都御史) 장봉(臧鳳) 들이 상소를 올려 이를 만류하였는데 답을 주지 않더니 조금 뒤에 역시나 장봉이 만류한 대로 하였다. 파아손(把兒孫)이 변경을 범하였을 당시에 조정(朝廷)에서 조서를 내려 그 직함을 깎아내렸다. 파아손(把兒孫)이 죽자 그 아들 백혁(伯革)이 공물을 들였다. 」 하였다.
세종(世宗) 가정(嘉靖) 9년(1540년), 조서를 내려 백혁(伯革)의 아버지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타합(打哈)이 자신은 직함을 얻지 못하였던 탓에 이어서 들어와 노략질하니 변장(邊將)이 방어를 잘못하여 모두 체포하여서 법으로 다스렸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9년, 조서를 내려 백혁(伯革)의 아버지에게 작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런데 타합(打哈)이 자신이 화당(花當)의 아들로서, 직함을 얻지 못하고 있음에 분노하였고 마침내 이어서 냉구(冷口), 찰애(擦崖), 희봉(喜峰) 땅 사이를 노략질하였다. 참장(參將) 원계훈(袁繼勳) 들이 방어에 실패하니 모두 체포하여 법으로 다스렸다. 」 하였다.
가정(嘉靖) 17년, 태녕부(泰寧部) 파당해(把當亥)가 들어와 노략질하니 총병(總兵) 마영(馬永)이 쳐서 베어 죽였다. 그 무리 파손(把孫)이 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소감왕(少監王) 영(永)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17년 봄, 지휘(指揮) 서호유(徐顥誘)가 태녕부(泰寧部) 아홉 사람을 살해하니 그 두목 파당해(把當亥)가 무리를 이끌고 대청보(大清堡)를 노략질하였는데 총병(總兵) 마영(馬永)이 쳐 베어 죽였다. 그 무리 파손(把孫)이 타안부(朵顏部) 무리를 데리고 다시 들어오니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고 있던(鎮守) 소감왕(少監王) 영(永)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다. 」 하였다.
가정(嘉靖) 22년, 조서를 내려 「 시마(馬市)와 목마(木市, 목재를 교역하던 시장)를 그만두게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22년 겨울, 묘전곡(墓田谷)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수비하고 있던 진순(陳舜)을 죽이니 부총병(副總兵) 왕계조(王繼祖) 들이 달려와 구원하여 30여 사람의 목을 베었다. 그 해에, 조서를 내려 옛날에 마련하였던 삼위(三衛)의 마시(馬市)를 그만두고 아울러 새로 마련하였던 목시(木市) 역시 그만두게 하였다. 가을, 삼위(三衛)가 다시 달단(韃靼)에 길잡이를 하여 요주(遼州)를 노략질하고 사하보(沙河堡)로 들어가니 수장(守將) 장경복(張景福)이 전투하다 죽었다. 삼위(三衛)가 갈마들며 침범한 것은 실제 타안부(朵顏部)의 합주아(哈舟兒), 진통사(陳通事)가 이 일을 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중원 땅 사람인데 포로로 잡히어 마침내 삼위(三衛)에게 쓰여진 것이다. 」 하였다.
가정(嘉靖) 24년, 타안 도독(朵顏都督)에게 금띠와 모자 꼭지를 금으로 만든 큰 모자를 하사하였다.
명회전(明會典)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24년, 타안 도독(朵顏都督)이 능히 사람을 억눌러 단속하여 변경 지역을 소란스럽지 않게 잘하였기 때문에 금띠(金帶)와 모자 꼭지를 금으로 만든 큰 모자를 주라고 윤허하였다. 답례(回賜)로 자진해서 선사할 말들을 아울러 데리고 오면 말들의 등급을 따지지 않고 매 한 마리에 고급 비단(綵段) 안감 겉감(表里) 둘, 비단(絹) 한 필을, 낙타(駝)는 각 한 마리에 안감 겉감 옷감 셋, 비단(絹) 열 필을 주었다. 위도독(衛都督), 도지휘(都指揮) 각 인원에 고급 비단(綵段) 옷감의 겉감 안감(表里) 하나를 더해 주었고, 토벌을 요구하고 천자의 하명을 청한 경우, 사안을 헤아려 물건(物件)을 주었다. 경사(京師)에 이른 경우, 명분에 비추어 물자를 내주었다. 위(衛)에 사람이 칙령대로 물건을 내주기를 청하여 물건을 가져다줄 사람을 보내어 받아 갔다. 상을 받기를 다 마친 날, 회동관(會同館, 변방 지역 나라들의 공물을 운반하던 사신(貢使))에서 3일 동안 장마당을 열게 하였다. 점포 장사와 행상들은 으레 하던 대로 재화를 가지고서 관(館)에 들어와 「양편이 공평하게 교역을 하였다.」 교역이 끝나고 순천부(順天府)에서는 그대로 계주(薊州)와 준화(遵化) 등지를 다니다가 만약 삼위(三衛)의 사람들은 있으면 저쪽으로 돌아가고 양측의 공평한 교역 영(令)을 듣도록 하였다. 각 사람은 소 한 마리, 쟁기(犁鏵) 하나, 솥 하나를 사가질 수 있고 금지한 물건을 사사로이 가지고 와서 매매함을 불허하였다. 이를 어기는 자는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 죄를 캐어내 다스렸다.」 하였다.
가정(嘉靖) 30년(1551년), 합주아(哈舟兒)가 벌을 받았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가정(嘉靖) 29년, 달단(韃靼)의 엄답(俺答)이 기전 동쪽(畿東, 지금 북경 지역)을 침범하기로 모의하였을 때, 합주아(哈舟兒)가 엄답에게 조하천로(潮河川路)를 가리켜 보여주어 엄답(俺答)이 백묘(白廟)로 군대를 옮겨두니 고북(古北)에 가까웠다. 주아(舟兒)가 속여 말하기를 “적(敵)이 이미 물러났다.” 하여 변경의 수비가 느슨해졌고, 엄답(俺答)이 마침내 합자동(鴿子洞), 조유구(曹榆溝)를 밟아서 들어와 곧장 기전(畿甸)을 침범하였다. 얼마 뒤에 엄답(俺答)이 마시(馬市)를 열기를 명나라 조정에 청하였는데 주아(舟兒)가 다시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속임수를 써서 막았다. 30년 계요 총독(薊遼總督) 하동(何棟)이 그에게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여 경사(京師)에 이르러 벌을 받았다. 가정(嘉靖) 42년 타안(朵顏)의 통한(通罕)이 엄답(俺答)의 길잡이를 하여 순의(順義, 지금 북경시)와 삼하(三河, 하북성)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 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타안(朵顏)의 통한(通罕)이란 사람은 엄답(俺答) 아들 신애(辛愛) 처의 아버지이다. 가정(嘉靖) 42년, 고북(古北) 땅에서 보초를 보던 병사(哨卒)가 관문을 나가다 타안(朵顏)에게 맞아죽었다. 조금 뒤에 통한(通罕)이 관문을 두드리고 상(賞)을 요구하였는데 부총병(副總兵) 호진(胡鎮)이 병사를 잠복시켜 이들을 잡았다. 총독(總督) 양선(楊選)이 장차 신애(辛愛)를 제재할 계산으로 곧 통한(通罕)을 구금하고 그의 여러 아들을 돌아가면서 인질로 삼게 하였다. 삼위(三衛)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더니 마침내 엄답(俺答)에 길잡이를 노릇을 하여 순의(順義)와 삼하(三河)에 들어와 노략질하니 죄지을 일만 골라 하였다.」
신종(神宗) 만력(萬曆) 12년(1584년), 타안(朵顏)의 장앙(長昂)이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1573년 – 1620년 7월) 초에 타안(朵顏)의 장앙(長昂)이 더욱 강성하여서 명나라를 위한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음에도 별도의 상(挾賞)을 받지 못하자 자주 그 붙이인 동고리(董孤狸)들과 무리를 규합하여 들어와 약탈하고 여러 변방에 울타리 나라들의 공물 길(貢道)을 끊었다. 12년 가을, 다시 토만(土蠻)의 길잡이를 하여 4천 기병을 나누어 삼산(三山), 삼도구(三道溝), 금주(錦州) 여러 곳을 약탈하였다. 수신(守臣) 이송(李松)이 서둘러 장앙(長昂) 들을 소탕하기를 청하였지만, 명나라 조정이 의견을 따르지 않고 겨우 그달에 내리려고 하였던 상(賞)만을 없앴다. 얼마 지나자 다시 기병 천명으로써 유가구(劉家口)를 침범하니 관군이 이를 막아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그 숫자가 서로 같았다. 이에 장앙(長昂)이 더욱 제멋대로 방자하게 날뛰었고 동쪽으로 토만(土蠻)을 자기편으로 끌어넣었으며 서쪽으로 백홍대(白洪大)와 혼인을 맺어서 여러 변경 지방을 소란하게 하였다. 」 하였다.
만력(萬曆) 17년, 장앙(長昂)이 요동(遼東) 땅을 노략질하였다. 총병(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이를 막아서 관군이 크게 이겼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17년, 타안(朵顏)의 장앙(長昂)이 달단(韃靼)의 동(東)과 서(西) 두(部)와 연합하여 요동(遼東) 땅을 노략질하였다. 총병(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이를 쫓아갔고 관군(官軍)이 크게 이겨 섬멸한 자가 팔백 사람이었다. 」
만력(萬曆) 19년, 장앙(長昂)이 독석로(獨石路)를 크게 약탈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2년, 장앙(長昂)이 중후소(中後所)를 노략질하였다.”라고 운운하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2년, 장앙(長昂)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중후소(中後所)를 침범하여 소둔대(小屯臺)를 공격하여 들어갔다. 부총병(副總兵) 조몽린(趙夢麟), 진득의(秦得倚)들이 힘껏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 하였다.
만력(萬曆) 23년, 장앙(長昂)이 몰래 희봉구(喜峰口)로 들어갔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3년, 장앙(長昂)이 몰래 희봉구(喜峰口)로 들어갔는데 관군이 그 두목 소랑아(小郎兒)를 체포하였다. 」
만력(萬曆) 29년, 장앙(長昂)이 동고리(董孤狸) 들과 더불어 모두 그 정성(선물)을 들였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29년, 장앙(長昂)이 동고리(董孤狸) 들과 더불어 모두 그 정성(선물)을 들이고, 다시 영전(寧前)의 목시(木市)를 열기를 청하였더니 이를 허락하였다. 」
만력(萬曆) 34년, 장앙(長昂)이 3천 기병을 데리고 의원(義院)의 경계를 엿보았는데 변장(邊將)이 방비하고 있어서 결국 기병을 이끌고 떠났다. 얼마 있다가 장앙(長昂)이 죽자 삼위(三衛)가 모두 안정되었다.
명외사(明外史) 타안(朵顏) 복여(福餘) 태녕전(泰寧傳)을 살펴보면
「만력(萬曆) 34년 겨울, 다시 달단(韃靼)의 반불습(班不什), 백언태길(白言台吉)들을 규합하여서 만명의 기병(萬騎)을 데리고 산해관(山海關)에 들이닥칠 판이었는데 총병(總兵) 강현모(姜 顯謨)가 이들을 쳐 달아나게 하였다. 장앙(長昂)이 다시 3천의 기병을 데리고 희원(義院) 경계를 엿보고 있었는데 변장(邊將)이 방비하고 있어서 결국 기병을 이끌고 떠났다. 곧 희봉(喜峰)에 나아가 스스로 “반(班, 班不什)과 백(白, 白言台吉)이 들어와 노략질하였을 때, 자신은 미리 알지 못하였다.”라고 아뢰었고 수신(守臣)이 이 말을 위에다 다 아뢰었다. 조서를 내려 장앙(長昂)이 다시 지정된 곳에서 무역(貢市)을 할 수 있게 하고 위로와 상을 내리기를 으레 하던 대로 하였다. 얼마 있다가 장앙(長昂)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조금씩 힘을 잃어갔지만, 삼위(三衛)가 모두 안정되었다. 」
欽定古今圖書集成/方輿彙編/邊裔典/第124卷
山戎部彙考一〈奚 厙莫奚 兀良哈 朵顏福餘泰寧三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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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朵顏福餘、泰寧,高皇帝 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 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種類。元為大寧路北 境。高皇帝有天下,東蕃遼王、惠寧王、朵顏元帥府相 率乞內附,于是即古會州地置大寧都司、營州諸衛, 封子權為寧王,使鎮焉。已數為韃靼所抄。」
按《明會典》:「朵顏衛、福餘衛、泰寧衛、兀良哈,即古山戎, 後稱厙莫奚,在烏龍江南,漁陽塞北。元時,大寧路北 境。國初,設北平行都司。洪武十四年,以大寧地封子 權為寧王。二十一年,遼王、惠寧王、朵顏元帥府元帥 等,各遣使來朝。」
洪武二十二年、始置泰寧、朵顏、福餘三衛。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洪武二十二年,乃置泰 寧、朵顏、福餘三衛指揮使司,俾其頭目各自領其眾以為聲援。自大寧前抵喜峰口近宣府,曰朵顏;自錦 義歷廣寧至遼河,曰泰寧;自黃泥窪逾瀋陽鐵嶺至 開原,曰福餘。獨朵顏地險而強,久之皆叛去。」
按《明會典》,「二十二年,乃分兀良哈為三衛於橫水之 北,曰朵顏,曰福餘,曰泰寧,以處降胡,授指揮使等官, 各賜冠帶,俾領所部。朵顏、福餘、泰寧三衛差來并自 來都督,賞綵段四表裏,絹二匹;都指揮綵段三表裏, 絹二匹;指揮千百戶所鎮撫頭目,每人綵段二表裏, 絹一匹,各織金紵絲衣一套,又各加綵段一表裏,舍」 人,每人綵段二表裏,絹一匹,織金衣一套;達子,每人 綵段一表裏,絹一匹,素紵絲衣一套。婦女有進貢者, 每人一表裏,絹一匹,紵絲女衣一套;隨來婦女一表 裏,絹一匹,女衣一套,以上靴襪各一雙。奏事進貢,都 指揮絹一匹,綵段三表裏,織金衣一套;指揮每人絹 一匹,綿布一匹,綵段二表裏,紵絲衣一套,靴襪各一 雙。舍人因事進貢者,每人綵段一表裏,織金衣一套, 絹一匹,靴襪各一雙
按《明一統志》:「兀良哈,東接海,西連開平界,北抵北海, 本春秋時山戎地,秦為遼西郡北境,漢為奚酋所據, 東漢征敗之,走匿松漠間。後魏之先復居於此,號厙 莫奚,後服屬契丹,元為大寧路北境。本朝洪武二十 二年,征敗北胡來降者眾,詔以兀良哈之地置泰寧、 朵顏、福餘三衛以處之,為東北外藩,命其長為指揮」 使、指揮同知,各領所部。自是每歲朝貢。
仁宗洪熙元年詔三衛許自新福餘衛奏印為賊所奪請印許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仁宗嗣位,詔三衛許自 新。洪熙元年,安出奏其印為寇所奪,請更給。許之。冬, 三衛頭目阿者禿來歸,授千戶,賜鈔幣、襲衣、鞍馬,仍 命有司給供具。自後來歸者,悉如例。」
宣宗宣德元年三衛掠永平山海帝將親討之三衛謝罪撫之如初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宣宗初,三衛掠永平、山 海間。帝將親討之,三衛頭目皆謝罪入貢,朝廷撫納 之如初。」
按《明會典》:「兀良哈,宣德間使臣朝貢,沿途茶飯接待。 宣德七年,以三衛頭目恭事日久,加賜金幣有差。」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宣德七年,更給泰寧衛 印。其秋,以朵顏頭目哈剌哈孫,福餘頭目安出、泰寧頭目脫火赤等恭事朝廷久,加賜織金綵幣表裏有 差。」
英宗正統 年三衛入寇潛附瓦剌也先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間,屢寇遼東、大同、 延安境,獨石守備楊洪擊敗之,擒其頭目朵欒帖木 兒。未幾,復附瓦剌也先。泰寧拙赤妻也先以女,皆陰 為之耳目。入貢輒易名,且互用其印,又入廣寧前屯。 帝惡其反覆。」
正統九年,命成國公朱勇等征三衛,敗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九年春,命成國公 朱勇偕恭順侯吳克忠出喜峰,興安伯徐亨出界嶺, 都督馬亮出劉家口,都督陳懷出古北,各將精兵萬 人分勦之。勇等捕其擾邊者致闕下,并奪回所掠人 畜。未幾,拙赤等拘肥河衛,使人殺之。肥河衛頭目別 里格與戰于格魯坤迭連,拙赤大敗。瓦剌復分道截」 殺,出兵攻之,三衛大困。
正統十二年,總兵曹義等擊敗三衛、瓦剌,復大掠之, 乞降于也先。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十二年春,總兵曹 義、參將胡源、都督焦禮等分巡東邊,值三衛入寇,掠 擊之,共斬首三十二級,擒七十餘人。其年,瓦剌賽刊 王復擊殺朵顏乃兒不花,大掠以去。也先繼至,朵顏、 泰寧皆不支乞降,而福餘獨走避腦溫江。于是三衛 益衰,畏瓦剌強,不敢背,仍歲來致貢,止以利中國賜」 賚而已。又心銜邊將勦殺,故常潛圖報復。
正統十四年,石亨等擊敗三衛,三衛導瓦剌大舉入 寇,上以是役北狩。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統十四年夏,大同參 將石亨等復擊其盜邊者于箭谿山,擒斬五十人,三 衛益怨。其秋,導瓦剌大入,英宗遂以是役北狩。」
代宗景泰 年遣使撫諭三衛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景泰初,朝廷仍遣使撫 諭三衛,受也先旨,數以非時入貢,多遣使往來伺察 中國。既而也先虐使之,復逼徙朵顏所部于黃河母 納地,三衛皆不堪,遂陰輸瓦剌情于中國,而請得近 邊屯駐。舊制,三衛每歲三貢,其貢使俱從喜峰口驗 入,有急報則許進永平。時三衛使有自獨石及萬全」 右衛來者,邊臣以為言,敕止之。
憲宗成化元年三衛朵羅干入寇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天順中,嘗乘間掠諸邊, 復竊通韃靼,孛來每為之鄉導。所遣使與孛來使臣 偕見,中國待韃靼厚,請加賞,不得,大忿,遂益與孛來 相結。成化元年,其頭目朵羅干等以兵從孛來大入 遼河。已,復西附毛里孩,東合海西兵數入塞,又時獨 出沒廣寧、義州間。」
成化九年,三衛入寇遼東,總兵歐信敗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九年,遼東總兵歐 信以偏將韓斌等敗之于興中,追及麥舟,斬首六十 二,獲馬畜器械幾數千。其年喜峰守將吳廣以貪賄 失三衛心,三衛入犯,廣下獄死。」
成化十年,三衛入寇開原、慶雲,參將周俊卻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十年,復掠開原、慶 雲,參將周俊擊退之。」
成化十四年,詔復「三衛馬市。」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十四年,詔復三衛 馬市。初,國家設遼東馬市三,一城東,一廣寧,皆以待 三衛。正統間,以其部眾屢叛,罷之。會韃靼滿都魯暴 強,侵掠三衛,三衛頭目皆走避塞下,數饑困,請復馬 市再四,不許。至是巡撫陳鉞為上言,始許之。滿都魯 死,亦思馬因主兵柄,三衛復數為所窘。」
成化二十二年,韃靼別部那孩大掠三衛,三衛逃匿 近邊,詔優卹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成化二十二年,韃靼別 部那孩復擁三萬眾入大寧金山,涉老河,攻殺三衛 頭目伯顏等,掠去人畜以萬計。三衛乃相率攜老弱 走匿邊圉。邊臣劉潺以聞,詔予芻糧優卹之。」
孝宗弘治 年三衛數盜入古北開原境未幾為小王子所掠因叩關輸罪宥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弘治初,三衛常盜掠古 北、開原境。既悔罪,而守臣張玉、總兵李杲等以計誘 斬其來市者三百人,遂北結脫羅干,請為復仇,數寇 廣寧、寧遠諸處。時海西尚古者,以不得通貢叛中國, 數以兵阻諸蕃入貢,諸蕃並銜之。朝廷旋許尚古納 款。于是撫寧猛克帖木兒等皆以尚古為辭,入寇遼」 陽,殺掠甚眾。未幾,韃靼小王子屢掠三衛,三衛因各 叩關輸罪。朝廷許之,然陽為恭順而已。朵顏都督花 當者,恃險而驕,數請增貢加賞,不許。
武宗正德十年朵顏都督遣其子把兒孫入寇命副總兵杜勇禦之乃匿把兒孫使其子打哈等入朝請罪詔釋之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德十年,花當遣其子把兒孫以千騎毀鯰魚關入,大掠馬蘭谷。參將陳乾戰死,復以五百騎入板場谷,千騎入神山嶺,又千餘 騎入水開洞。事聞,命副總兵杜勇禦之。花當旋退去, 屯駐紅羅山,匿把兒孫,而使其子打哈等入朝請罪。 詔釋不問。」
正德十三年,把兒孫死,其子伯革入貢。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正德十三年,帝巡幸至 大喜峰口,將徵三衛頭目,使悉詣關下宴勞。都御史 臧鳳等疏止之,不報,尋亦不果。當把兒孫犯邊時,朝 廷詔削其職。把兒孫死,其子伯革入貢。」
世宗嘉靖九年詔予伯革父爵而打哈自以不得職先後入寇邊將失防禦皆逮治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九年,詔予伯革父 爵。而打哈自以花當子不得職,怒,遂先後掠冷口、擦 崖、喜峰間。參將袁繼勳等失于防禦,皆逮治。」
嘉靖十七年,泰寧部把《當亥》入寇,總兵馬永擊斬之。 其屬把孫入寇,少監王永與戰,敗績。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十七年春,指揮徐 顥誘殺泰寧部九人,其頭目把當亥率眾寇大清堡, 總兵馬永擊斬之。其屬把孫以朵顏部眾復入,鎮守 少監王永與戰,敗績。」
嘉靖二十二年,詔「罷馬市及木市。」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二十二年冬,攻圍 墓田谷,殺守備陳舜,副總兵王繼祖等赴援,擊斬三 十餘級。其年,詔罷舊設三衛馬市,并新設木市亦罷 之。秋,三衛復導韃靼寇遼州,入沙河堡,守將張景福 戰死。」三衛之迭犯也,實朵顏部哈舟兒、陳通事為之。 二人者,俱中國人,被鹵,遂為三衛用。
嘉靖二十四年,賜朵顏都督金帶、金頂大帽。
按《明會典》:「嘉靖二十四年,以朵顏都督能鈐束人,不 擾邊境,准與金帶及金頂大帽,回賜。自進并帶進馬 匹,不分等第,每匹綵段二表裏,絹一匹;駝每隻三表 裏,絹十匹。在衛都督、都指揮每員加賜綵段一表裏, 求討,請旨,量與物件。到京者,照名給散;在衛者,請敕 開付,差來人領去。領賞畢日,許於會同館開市三日。」 鋪行人等照例將貨入館「兩平交易」順天府仍行薊 州遵化等處。如三衛人回還到彼聽令兩平交易。每 人許收買牛一隻,犁鏵一副鍋一口。不許將違禁之 物私自夾賣。違者巡按御史究治。
嘉靖三十年,哈舟兒伏誅。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嘉靖二十九年,韃靼俺 答謀犯畿東,哈舟兒為指潮河川路,俺答移兵白廟, 近古北,舟兒詐言敵已退,邊備緩,俺答遂由鴿子洞、 曹榆溝入,直犯畿甸。已,俺答請開馬市,舟兒復往來 誘阻之。三十年,薊遼總督何棟購捕至京,伏誅。」 嘉靖四十二年,朵顏通罕導俺答入掠順義三河。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朵顏通罕者,俺答子辛 愛妻父也。嘉靖四十二年,古北哨卒出關,為朵顏所 撲殺。俄,通罕叩關索賞,副總兵胡鎮伏兵執之。總督 楊選將為牽制辛愛計,乃拘縶通罕,令其諸子更迭 為質。三衛恨甚,遂導俺答入掠順義及三河,選得罪。」
神宗萬曆十二年朵顏長昂入寇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初,朵顏長昂益強, 挾賞不遂,數與其屬董孤狸等糾眾入掠,截諸蕃貢 道。十二年秋,復導土蠻以四千騎分掠三山、三道溝、 錦州諸處。守臣李松請急勦長昂等,朝議不從,僅革 其月賞。未幾,復以千騎犯劉家口,官軍禦之,殺傷相 當。于是長昂益跋扈自恣,東勾土蠻,西結婚白洪大」, 以擾諸邊。
萬曆十七年,長昂寇遼東。總兵李成梁禦之,官軍敗 績。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十七年,朵顏長昂 合韃靼東西二部寇遼東。總兵李成梁逐之,官軍大 敗,殲者八百人。」
萬曆十九年,長昂大掠獨石路。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云云。
萬曆二十二年,長昂寇中後所。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二十二年,長昂復 擁眾犯中後所,攻入小屯臺。副總兵趙夢麟、秦得倚 等力戰卻之。」
萬曆二十三年,長昂潛入喜峰口。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二十三年,長昂潛 入喜峰口,官軍擒其頭目小郎兒。」
萬曆二十九年,長昂與《董孤狸》等皆納款。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二十九年,長昂董 孤狸等皆納款,請復寧前木市,許之。」
萬曆三十四年,長昂以三千騎窺義院界,邊將有備, 乃引去。頃之,長昂死,三衛皆靖。
按《明外史朵顏福餘泰寧傳》:「萬曆三十四年冬,復糾 韃靼班不什白言台吉等,以萬騎迫山海關,總兵姜 顯謨擊走之。長昂復以三千騎窺義院界,邊將有備乃引去。旋詣喜峰,自言班、白入寇,已不預知,守臣具 以聞。詔長昂復通貢市,頒給撫賞如例。頃之,長昂死, 諸子稍衰,三衛皆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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