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사(金史)에 나온 고(구)려인 시조 함보(函普)
금(金)나라 시조의 살아서의 이름은 함보(函普)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 여세가 되었다. 그의 형 아고내(阿古廼)는 부처를 신봉하여 고려에 머물고 따라오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후대의 자손들에 반드시 서로를 모이게 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떠날 수가 없다.” 하니 함보(函普)는 아우 보활리(保活里)와만 동행하였다. 시조(始祖) 함보(函普)가 완안부(完顏部)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에서 살고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그 뒤에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曷蘇館) 땅을 가지고서 금나라 태조에게 귀의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조상의 형제 세 명이 서로 이별하여 떠났다.” 하니 아마도 스스로 ‘아고내(阿古廼)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이다. 석토문(石土門), 적고내(迪古乃)는 보활리(保活里)의 후예이다. 금 태조가 국경에서 요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그 장수 야율사십(耶律謝十)을 잡았을 무렵에 마침내 양복(梁福)과 알답자(斡答刺)를 보내어 발해인을 설득할 뜻을 나타내어 “여직(女直)이나 발해는 뿌리가 같은 한 가족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그 민족들이 초반에 모두 물길(勿吉)의 7부(部)였던 것이다.
金史卷一 本紀第一: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廼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蓋自謂阿古廼之後。石土門、迪古乃,保活里之裔也。及太祖敗遼兵于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斡答刺招諭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시조 함보가 완안부에 이르러서 지낸 지 오래되었을 때, 한번은 그 부족 사람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였다. 이로 인해 두 종족이 서로를 미워하여 치고받는 싸움이 없어지지 않았다. 완안부 사람이 시조 함보(函普)에게 “만약 부족 사람들을 위해 이 원한을 풀어서 두 종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되고, 우리 부족에 어진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인데 아직 미혼이라, 그대의 짝으로 맞이하면 그대로 같은 부족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시조 함보(函普)가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이에 스스로 원한이 있는 집에 가서 그들을 달래며 말하기를 “사람 하나를 죽이는 바람에 싸움이 없어지지 않으니 손해만 더 많다. 그저 부족 내에서 주동자 한 사람을 처벌하고 물건으로 보상하여 너에게 들인다면 싸움은 없게 되고 나아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니 그리하는 게 어떻겠는가?” 하니 그 집안이 이를 따랐다.
始祖至完顏部,居久之,其部人嘗殺它族之人,由是兩族交惡,鬨鬭不能解。完顏部人謂始祖曰:「若能為部人解此怨,使兩族不相殺,部有賢女,年六十而未嫁,當以相配,仍為同部。」始祖曰:「諾。」廼自往諭之曰:「殺一人而鬭不解,損傷益多。曷若止誅首亂者一人,部內以物納償汝,可以無鬭而且獲利焉。」怨家從之。
드디어 함보(函普)가 약조를 위해 말하기를 “대개 남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은 그 한집안 사람들에게 말 10쌍, 어미 소 10마리, 황금 6량(兩)을 징발하여서 죽이거나 다치게 한 집에 주고, 그 즉시 원한을 풀고서 사사로운 싸움은 하지 못한다.” 하였다. 원한이 있는 집사람이 “약속대로 삼가겠다.” 하였다. 여진(女直)의 풍속에 사람을 죽이면 말과 소 30마리를 보상하였던 것이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미 약속대로 다 갚아주니 부족 무리가 함보(函普)를 믿고 복종하였으며 푸른 소 한 마리를 사례하고 아울러 60세의 여인에게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乃為約曰:「凡有殺傷人者,徵其家人口一、馬十偶、牸牛十、黃金六兩,與所殺傷之家,即兩解,不得私鬭。」曰:「謹如約。」女直之俗,殺人償馬牛三十自此始。既備償如約,部眾信服之,謝以青牛一,并許歸六十之婦。
시조 함보(函普)가 푸른 소를 결혼 예물로 삼아서 여자 집안에 들이고, 아울러 그 재산을 가졌다. 뒤에 아들 둘을 낳았으니 맏이는 오로(烏魯)이고 둘째는 알로(斡魯)이고 딸 하나는 주사판(注思板)이다. 함보(函普)가 마침내 완안부(完顏部) 사람이 되었다. 천회(天會) 14년(1136년), 뒤미쳐 시호를 ‘경원황제(景元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시조(始祖)’라 하였다. 황통 4년(1144년), 그가 묻힌 곳을 ‘광릉(光陵)’이라 이름하였다. 5년 그 시호에 더하여 ‘시조자헌경원황제(始祖懿憲景元皇帝)’라 하였다. (금사(金史) 1권 본기(本紀) 제1)
始祖乃以青牛為聘禮而納之,并得其貲產。後生二男,長曰烏魯,次曰斡魯,一女曰注思板,遂為完顏部人。天會十四年,追諡景元皇帝,廟號始祖。皇統四年,號其藏曰光陵。五年,增諡始祖懿憲景元皇帝。
○곁드린 자료
1. 박화리(博和哩)는 보활리(保活里)이다 : ‘완두콩(豌豆)’을 뜻한다. 보활리(保活里)라고도 쓴다.
博和哩 : 豌豆也 卷一 作保活里
2. 호십문(胡十門)
1) 호십문(胡十門)은 호실묵(呼實黙)이다 : “한 해를 넘기다의 ‘넘기다’(經年之經)”라는 뜻이다. 호십문(胡十門), 호실문(胡失門), 호십만(胡十滿)이라고도 한다.
呼實黙 : 經年之經也 卷一 作胡十門 卷十六 作胡失門 卷六十七 作胡十滿 併改
2) 호석한(呼錫罕) : ‘치마(裙)’를 뜻한다. 원래 호십문(胡十門)이라고 쓴다.
呼錫罕 : 裙也 原作胡十門
3) 호십문(胡十門)은 금나라 시조 함보의 형 아고내(阿古廼)의 후손으로 갈소관(曷蘇館)은 지금 요녕(遼寧) 와방점(瓦房店 대련시) 경계라고 한다.
3. 갈소관(曷蘇館) : 합소곤(合蘇袞), 화석관(和碩館), 알속관(遏速館), 합사한(合思罕), 합소관(合蘇款), 소관(蘇館)이라고도 한다. 요나라 때의 여진 부락인데 요(遼)의 아보기(阿保機)가 강성한 가문들을 요양(遼陽) 남쪽으로 이주시켰고 금나라 때에 이곳에 갈소관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지금 요녕성(遼寧省) 개현(蓋縣) 일대이다.
4. 석토문(石土門)은 실도미(實圖美)이다 : 실도미(實圖美) : 몽고어이니 ‘목덜미에 이다(項戴)’를 뜻한다. 석토문(石土門), 신토만(神土懣), 신토문(神土門)이라고도 한다.
實圖美 : 蒙古語 項戴也 卷一 作石土門 卷六 作神土懣 卷八十五 作神土門 併改
5. 도고로눌(都古嚕訥) : 몽고어이니 ‘가득 차다(盈滿)’라는 뜻이다. 적고내(迪古乃) 적고내(敵古迺)라고도 한다. 해릉(海陵)의 이름이다.
都古嚕訥 : 䝉古語 盈滿也 卷一 作迪古乃 卷五十九 作敵古迺 併改 海陵名
6. 복간수(僕幹水)
1) 복간수(僕幹水) : 금사 세기(金史 世紀) 소조(昭祖)의 이야기에서 복연수(僕鷰水)가 나오는데 이 복연수가 복간수(僕幹水)라고 한다. 복연(僕鷰)은 ‘지독한 종기(惡瘡)’라는 뜻인데 소조(昭祖)가 이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발해 시대에는 홀한수(忽汗水)라고 하였다. 지금 송화강 제2대 지류인 무단강(牡丹江)이다. 호이합하(瑚爾哈河), 호이합(湖爾哈), 호이합(呼爾哈), 호이합(虎爾哈), 부이한(富爾翰), 호리개(胡里改)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한다.
2) 간(幹)과 간(斡)은 서로 통용한다. : 한서(漢書) 19권에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간(斡)의 음은 ‘다스릴 관(筦)’이다. 더러는 다스릴 간(幹)으로도 쓴다. 간(斡)은 ‘주관할 주(主)’이다. 본문에 실린 이른바 ‘소금과 철(鐵)에 따른 재정을 주관(斡)하고 술을 전매하였다’라는 것이다.’” 所謂斡鹽鐵而榷酒酤也。 如淳曰:「斡音筦,或作幹。斡,主也,主均輸之事,所謂斡鹽鐵而榷酒酤也。
3) 또한 복간수(僕幹水)는 포〈이〉한(布〈爾〉罕)이다. 〈포이한은 몽고어이니 ‘부처(佛)’를 뜻한다. 복간(樸斡)이라고도 하니 물 이름이다. 또한 파랄간(婆剌趕)이라고도 하는데 산이름이다.
布〈爾〉罕 〈䝉古語佛也卷一作樸斡水名卷七十二作婆剌趕山名並改〉
4) 포이한(布〈爾〉罕) : ‘부처(佛)’를 뜻한다. 복로한(蔔魯罕)이라고도 쓴다.
布〈爾〉罕 〈佛也卷一百六作蔔魯罕〉
5) 포이한(布〈爾〉罕) : ‘부처(佛)’를 뜻한다. 불로한(不魯罕)이라고도 쓴다.
布〈爾〉罕 〈佛也卷一百九作不魯罕〉
6) 포이한(布〈爾〉罕) : ‘부처(佛)’를 뜻한다. 불간(不幹), 불로합간(不魯合罕), 부랄한(不剌罕), 패리해(孛裏海)라고도 쓴다.
布〈爾〉罕 〈佛也卷六作不幹卷十四作不魯合罕卷十九作不剌罕卷一百四十八作孛裏海並改〉
7) 포이한단(布〈爾〉罕丹) : 포이한(布爾罕)은 ‘부처(佛)’라는 뜻이다. 단(丹)은 ‘갖다(有)’라는 뜻이다. 불아한정(不兒罕丁)이라고도 쓴다.
布〈爾〉罕丹 〈布爾罕佛也丹有也卷二十六作不兒罕丁〉
8) 또한 포이갈수(布爾噶水)가 있다. 만주원류고 15권에 “포이갈수(布爾噶水)는 금사(金史)에 ‘시조(始祖) 함보가 완안부(完顔部) 포이갈수(布爾噶水) 가에서 살았다.’ 하였다. 〈옛날에는 복간(僕斡)이라고 썼는데 지금 고쳤다.〉”라고 하였다. (만주원류고 15권)
欽定滿洲源流考 卷15 : 布爾噶水 : 金史始祖居完顔部布爾噶〈舊作僕斡今改〉水之涯
7. 야라(耶懶)
1) 야라(耶懶)는 찰란(紮蘭)이다 : 찰란(紮蘭) : ‘세대(世代)’를 뜻한다. 야라(耶懶)이라고도 하니 부족이름이다.
紮蘭 〈世代也 卷一作耶懶 部名〉
2) 찰란(紮蘭) : ‘세대(世代)’를 뜻한다. 야라(耶懶)라고도 하고 억라(抑懶)라고도 한다. 지역이름이다.
紮蘭 〈世代也 卷一作耶懶 卷七十作抑懶 並改 地名〉
3) 야라(耶懶)는 지금 오소리사극성(烏蘇里斯克城) 남쪽, 쌍성자(雙城子) 곧 우수리스크라고 한다.
*완안씨(完顔氏)는 객랍심(喀拉沁)에서 나온 혈통이다. 完顔氏 〈系出喀拉沁〉
2. 완안씨(完顔氏)와 고(구)려인 함보(函普)
금나라의 선조는 원위(元魏) 시대에 물길씨(勿吉氏)라 하여 7부(部)가 있었고 수나라 때 이르러 말갈씨(靺鞨氏)라 일컬었고 당나라 초에 흑수(黑水)와 속말(粟末) 2부(部)가 있었는데 나머지 5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뒤에 발해에서 살며 왕을 추대하였으니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날 숙신(肅慎)의 땅 동쪽 바닷가에서 살았다. 오대(五代) 시대에 거란이 발해의 땅을 취하니 흑수부(黒水部)가 결국 이들에게 따라붙었다. 남쪽에 있던 흑수부는 거란에 호적을 달아두고 북쪽에 있던 흑수부는 거란에 호적을 달아매지 않고 스스로 한 부(部)를 만들었다. 말갈씨(靺鞨氏 곧 여진) 중에 함보(函普)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으니 고(구)려에서 와 완안부(完顔部)에 살면서 부족 사람을 위해 서약(계약)을 세워서 부족 사람들 사이의 원한을 풀어내었다. 부족에 슬기로운 여자가 있었으니 나이는 60세인데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던지라 함보(函普)가 그녀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둘을 낳았다. 이로 인해 완안부 사람이 되었으니 곧 금나라 시조 경원황제(景元皇帝)이다. 금나라가 흥기한 초기에 완안이 12부였는데 뒤에 모두 완안(完顔)을 씨(氏)로 삼았다. 또 종실의 표기에 종실(宗室)이라 일컫는 사람이 있고, 완안(完顔)이라 일컫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 완안을 부르는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동성 완안(同姓完顔)이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먼 집안들이고 이성완안(異姓完顔)이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부족 사람들이다. (흠정속통지(欽定續通志) 28권 )
○곁드린 자료 원문
欽定續通志卷八十二 完顔氏 : 金之先 在元魏時 為勿吉氏 有七部 至隋 稱靺鞨氏 唐初 有黑水粟末二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後居渤海 稱王 姓大氏 黑水靺鞨居古肅慎地東瀕海 五代時 契丹取渤海地 黒水部遂附屬焉 在南者係籍契丹 在北者不籍契丹 自為一部 靺鞨氏有名函普者 自髙麗往 居完顔部 為部人立約誓 解怨 部有賢女年六十 末嫁 函普娶之 生二子 因為完顔部人 即金之始祖景元皇帝也 金初起時 完顔十二部 後皆以為氏 又宗室表有稱宗室者 有稱完顔者 其稱完顔有二 有同姓完顔 葢疎族 有異姓完顔 葢部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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